[혜화산책] 낙원(駱園)의 밤

관리자
발행일 2023.04.04. 조회수 35307
스토리

[월간경실련 2023년 3,4월호-우리들이야기(4)]

낙원(駱園)의 밤


-곡선과 어둠의 미장센-


최윤석 사회정책국 간사


‘낙산’에서 ‘낙(駱)’자의 훈은 ‘낙타’이다. 이번 달 ‘혜화산책’ 제목에 쓸만한 말장난 거리를 찾아보다가 알게 됐다. 기껏해야 ‘떨어질 낙(落)’, 더 가봐야 ‘풍류 락(樂)’ 정도나 되겠지 싶었는데 정말로 ‘낙타 낙(駱)’이었을 줄이야. 심지어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아예 대놓고 ‘낙타산(駱駝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도심에서 뜬금없이 솟은 낙산의 가늘고 긴 능선을 보며 종종 낙타의 봉(峯)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렇단다. 그래서 낙타산이란다.1) 2) 참, 조상님들 보시는 눈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다가도,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사람들이 이역만리 타국에만 살던 낙타를 어떻게 알았을까? 미스터리가 남는다. 그것도 낙산이라는 이 친근한 산의 메타포로 삼을 만큼 익숙했다니.


귀 기울여 정적을 듣는 시간

어쨌거나 다시 낙산에 올랐다. 낙타의 등처럼 생긴 그 능선을. 평지에 조성된 공원이 기껏해야 2차원의 움직임을 허락하는 데에 반해 이 낙타 등 위에서는 3차원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것도 그냥 낙타가 아니라 굽이굽이 척추가 측만한 낙타라서, 한낮의 낙산은 이벤트 밀도3)가 높은 거리처럼 점하고 싶은 지점들이 다채롭고 또 많다.

그러나 밤의 낙산은 그 많은 이야기를 암막 뒤에 숨기고 성곽의 선과 면으로만 남는다. 달도 밝지 않은 하현이었다. 창경궁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타이어 마찰음이 먼 북소리처럼 울리는 즈음이면 그제야 풀벌레들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그리고 그보다 더 내밀한 연인들의 간질거림이 들려온다. 이 은밀한 밤을 겨우내 기다려 왔다. 쿨타임4) 찼다. 밤공기에 아직 겨울의 잔향이 설핏 느껴지는, 이맘때쯤이면 더할 나위 없다. 모처럼 만나는 리즈시절5) 낙산의 전경을 몇 컷의 사진 속에 담아보았다.


이세계로 가는 길

근처 노포(老鋪)에서 치킨에 소주 한잔을 걸쳤다. 문을 나서자 완연한 밤이다. 식당가의 번잡함이 훅 끼쳐왔다. 술자리에 쏟아져 나온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귓가에 윙윙거렸다. 어서 고요의 세계로 가자.


저 매듭처럼 생긴 오르막길이 일종의 관문이다. 낙산판 엘리스의 토끼굴이랄까. ‘이화달팽이길’, 활기 가득한 동대문·대학로와 고요한 낙산공원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웹소설에서는 주인공이 꼭 저런 환경에서 이세계(異世界)6)로 넘어가던데. 보기와 다르게 제법 경사가 가파르다. 걸음에만 집중하다 보면 시나브로 뇌파가 다른 활동 영역으로 전환된 듯한 느낌이 든다.

낮에는 사진 아래에서 위로 뻗은 저 내리막길 너머로 종로의 전경이 훤히 보인다. 동그랗게 길을 둘러싼 건물들은 아늑한 감정이 들게 한다. 그래서 점심께 보면 어쩐지 신카이 마코토(しんかいまこと)7)풍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다. 반면 밤에 보니 80년대 홍콩영화에 나오는 뒷골목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느낌이다.


낙산의 산장지기들

공원은 한산했다. 평일이겠거니와, 아직 밤공기가 쌀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쩌면 낙산에서 가장 따듯한 곳에 찾아가 어깨를 맞대고 따듯한 차를 후후 불어가며 마시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카페거리다.

낙산 서편 경사면에는 이런저런 거리들이 많아서, 산이란 사실이 무색하게 온갖 점포가 다 있다. 다만 해가 지면 대부분 문을 닫는다. 그래서 어디 들어갈 곳이 마땅치 않다. 정상께에 있는 이 루프탑 카페들만이 늦은 밤까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꼭 들어가지 않더라도, 카페 입구의 은은한 조명이 성곽과 어울리며 시야를 따듯하게 만든다. 인적이 드물어 길과 풍경을 홀로 즐길 수 있었던 건 덤이다. 근교에 살았다면 따듯한 뱅쇼 따위를 테이블에 반쯤 폼으로 올려놓고 짐짓 여유롭게 제멋에 취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럴 땐 돌아갈 곳이 멀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다.


낙-산티아고 순례길

술도 좀 마셨겠다. 발밑에 줄지어 늘어선 조명들, 그 조명이 비추는 돌담을 길잡이 삼아 하염없이 따라가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끝도 없이 이어진 길, 숙명처럼 주어진 하나뿐인 경로를 따라 순례자는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한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쳐 서로 놀라 얼어붙었다.

장수마을 골목골목에서 익숙한 찌개 냄새가 바람에 실려와 놀리듯 코끝을 자극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잘못 잡힌 라디오 전파처럼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아주 멀리 여행을 온 듯한 느낌. 새삼스럽지 않은 환경이 만든 익숙한 낯선 자극이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들을 소환한다. 어느새 차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저 멀리 혜화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야경을 보며 ㄴ r 는 가끔 눈물을 흘린 ㄷ r

자연(自然)은 저절로(自) 그러하기에(然) 자연의 빛은 사람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향한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빛은 저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비춘다. 어디에 서건 야경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때문일지도. 필요해서 켜진 빛은 그것대로, 충분해서 꺼진 어둠은 또 그것대로.


봄이 더 커지기 전에 낙원(駱園)의 밤에 취해보시기를. 몇 컷의 사진으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은 이야기들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때를 기다리며 숨죽여 움츠리고 있는 봄의 정령들과, 공원을 가득 채운 풋풋함, 그리고 그날의 대기에 속절없이 이끌려 나올 어떤 그리움 같은 것들을.






1)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낙산을 ‘낙타산’ 또는 ‘타락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낙타산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본문대로이고, 타락산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타락(발효 우유)’을 조달하던 ‘유우소’가 있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처럼 그 유래가 전혀 다른데, 공교롭게도 ‘타락(駝駱)’과 ‘낙타(駱駝)’의 음훈이 같다. 이 산은 이러나저러나 ‘낙(駱)’산이 될 운명이었나보다.
2) 같은 유래로 같은 지명을 가진 산이 평안남도 영원군에 하나 더 있다.
3) 일정한 거리(학술적으로는 주로 100m)에 면해있는 출입구 수
4) 주로 온라인 게임에서, 스킬이나 아이템을 다시 사용하는 데 걸리는 시간.
5) 외모, 인기, 실력 따위가 절정에 올라 가장 좋은 시기
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7)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 등을 만든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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