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의] 한국인을 조심하라

관리자
발행일 1999.10.10. 조회수 12469
칼럼

 


한국인을 조심하라



송영 소설가


 


연변여행을 위해 고양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한국인 중국여행자들에 관한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는 얘기들을 많이 얻어 듣고 얼굴을 혼자 붉힌 일이 있다.


 


많이 알려진 일이지만 그쪽은 경제형편이 이쪽에 비해 많이 열악하고 물자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화폐 교환가치 또한 절대적 열세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백 달러 자리 미화는 그곳 중간쯤 봉급자의 3개월치 보수에 해당되어 굉장한 거액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우리 여행자 가운데는 연변 동포 앞에서 백 달러 미화를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막강재력(?)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또 안내하는 동포 처녀가 입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이것도 옷이라고 입고 다니느냐? 내가 고국에 가면 진짜 좋은 옷을 얼마든지 보내주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연변의 서민촌락에는 화장실에 문이 부실하거나 좌우의 벽이 매우 낮아 칸막이가 제대로 안된 곳도 더러 있는 모양인데 어쩌다 이런 곳을 발견한 어떤 여행자가 무슨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찾아낸 듯 동행자들을 큰소리로 불어모아 이 진기한 풍경을 여럿이 보게 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 사람은 카메라를 꺼내 이 진기한 화장실을 찍어대고 심지어 그 속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카메라를 들이대다가 동포 청년들로부터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동포 여인을 돈으로 희롱했다던가 건물을 지어 주겠다고 기공식까지 치르고 자취를 감췄다던가 등의 얘기들이 끝도 없이 줄을 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좀처럼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 얘기들이지만 그러나 같은 한국 사람인 우리끼리는 이런 얘기가 결코 낭설이 아니고 충분히 있음직한 일임은 알고 있다.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국민교육헌장에는 명시되어 있었지만 이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당장 연변행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솟구칠 정도였다.


 


한국인이란 사실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충무의 바닷가에서 열린 며칠 동안의 문학캠프에 참가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집근처까지 다 와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사천에서 김포까지 비행기를 탔고 김포에서 우리 동네까지 버스를 탔는데 그 긴 여정을 무사히 달려온 사람이 길 하나만 건너면 집인데 그만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나는 길을 건널 때 파란불이 켜져도 금방 횡단보도로 나서지 않고 몇초 동안 좌우전후를 잘 살핀 뒤 차가 달려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길을 건넌다. 차를 가진 서울시민들의 조급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날도 물론 나는 평소의 조심성을 충분히 발휘한 뒤 횡단보도로 나섰다. 저녁이 되어 주변은 어두웠다. 그런데 내가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 엑셀 한 대가 옆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쏜살같이 저쪽으로 달려갔다. 눈앞이 아찔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걸음을 옮겼을 때 또 한 대의 프라이드가 내 코앞을 쏜살같이 지나가는 게 아닌가. 그 자동차 바퀴는 틀림없이 내 구두 코를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한동안 넋을 잃고 달려가는 차의 뒷모습을 쳐다봤으나 어두워서 차번호 따위는 알 수 없었다. 만약 내가 평소의 조심성을 발휘하지 않고 파란불이 켜짐과 동시에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면 나는 그때 본의 아니게 이승을 하직했을 것이다. 내가 남들처럼 걸음을 빨리 걷는 사람이었더라도 나는 그때 가족은 물론 사랑하는 이웃들과 고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길을 건넌뒤 진땀을 닦아내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한국인을 조심해야지. 여기가 서울이고 내가 한국인들 틈속엣 살고 있다는 걸 늘 명심해야지.’


 


자동차 핸들을 잡은 사람에겐 신호등이란 규칙을 불필요하고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바쁘고 다급한다? 그 차의 운전자를 만나서 한번 묻고 싶었다. 그는 합리적인 답변을 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남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몇초 빨리 가야 하는 이유란 세상에 없다. 문제는 그 사람이 안고 있고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사회병리 현상이다.


 


우리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법이나 규칙이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운용되지 않기 때문에 법이나 규칙이 무용지물이란 말이 떠돈 지 오래다. 사람들이 염치가 없어졌다고 한다. 수단이야 무엇을 쓰던 목적만 달성하면 그놈이 장하고 승리자가 되고 때로는 도덕군자로 둔갑도 한다.


 


집을 사러온 여자가 남의 집을 형편없이 깍자고 졸라대는 광경을 보았다. 장사꾼도 한두푼 이득을 봐가지곤 직성이 안 풀린다. 단숨에 몇갑절 남겨야 장사를 제대로 했다고 생각한다. 돈 몇백만원 벌어가지고는 돈벌었다는 말도 꺼낼 수 없다. 사기를 쳐서라도 최소한 몇억, 몇십억은 먹어야 돈을 벌었다는 측에 낀다.


 


우리는 스케일이 아주 커졌다. 차도 대형차, 아파트도 무조건 대형이다. 거리에는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운전자 혼자만 탄 대형차들이 줄지어 달려간다. 심지어는 책을 쓰고 책을 내는 사람들조차 책의 내용엔 아랑곳없이 많이 팔린 책, 많이 판 놈이 장땡이다. 많이 팔린 책이 곧 양서가 된다. 출판사 사장님은 저자에게 돈을 내밀면서 3개월 안에 책 한 권을 써내라고 강박한다.


 


한국인을 조심하라. 우리는 지금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돈에 걸신들린 사람들이 차를 몰고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역사적인 지방의회 선거를 통해 의원의 영광을 차지한 선량들이 그 첫 번째 행적으로 뇌물수수, 추행 등을 일으켜 신문지면을 장식했고 어떤 선향들은 교통법규를 무시하고 불법주차를 한 것으로 부족해서 지방관리들에게 호통을 치고 법석을 떨어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했다. 비록 지방의원 신분이나 차들이 하나같이 대형 호화차향이란 점이 이색적이었다. 돈과 권력이 함께 간다는 말은 역시 진리인 모양이다.


 


그런데 억척같이 돈을 벌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추구하는 것일까?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 가치가 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사회엔 가치개념이 없거나 그것이 전도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 말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는 정말 차분하게 우리 자신의 맹목적 질주에 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경제정의 1991년 9,10월 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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