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 엘클라시코와 올드펌

 

김건호 국책사업감시팀장

 

 

“프랑코한테까지 맞선 카탈루냐의 정신, 그 중심에 바르샤가 있었잖아요. 홈 구장 누 캄프는 진짜 울분과 분노를 배출하는 유일한 해방구였다고요.바르샤는 바르셀로나의 고결한 정신이에요. 축구이상이죠.”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중 여주인공 인아의 말)

 

스페인은 카스티야, 카탈루냐, 아라곤, 바스크등의 국가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 온 나라이다. 1469년 각국 간의 각축이 끝나고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하는 카스티야 왕국이 다른 왕국들을 통합하면서 스페인 왕국이 탄생한다. 하지만 카탈루냐, 바스크 등 비카스티야 지역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이 곪디 곪은 상처는 1936년 2월 총선거에서 인민전선 내각이 성립되자 이에 반발하여 프랑코 장군이 인솔하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내전으로 이어진다.

 

반정부군은 마드리드를 거점으로 한 귀족과 지주들의 지지 그리고 파시스트 세력을 확장하려는 독일·이탈리아의 전폭적인 원조가 겹치면서 처음부터 우위를 점해갔다. 반면 카탈루냐 지역을 거점으로 한 좌파 인민전선은 대다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중립을 표방한 미국 등 국제사회의 방조 속에 점차 힘을 잃게 된다.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 헤밍웨이, 조지 오웰 등 유럽 각지의 지식인과 젊은이들이 ‘지금은 펜이 아니라 총을 들 때’라고 외치며 ‘국제여단’의 이름으로 내전에 참여했지만 파시스트의 승리를 막지는 못했다. 약 50만 명의 희생을 낳은 가운데 1939년 마드리드에 반정부군이 입성하면서 내전은 끝났다. 하지만 이때 부터 또 다른 내전, ‘엘 클라시코(El Clasico, 영어로는 the classical) 더비’가 본격화 된다.

 

내전이 끝나자 프랑코 정권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인민전선을 지지했던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의 독자 언어와 깃발 사용을 금지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카탈루냐 지역의 상징이었던 축구클럽 FC 바르샤의 명칭을 CF 바르샤로, 과거 카탈루냐의 마지막 국왕이 시해를 당하면서 핏자국을 남긴 것을 묘사한 클럽 엠블럼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강제로 바꾼다. 그리고 국왕으로부터 ‘레알(royal)’을 하사받은 레알 마드리드를 스페인 통합이라는 미명 하에 이른바 ‘전국구 팀’으로 만드는 데 적극 나서게 된다.

 

이미 내전 시기 바르샤의 회장이었던 호셉 수놀이 반정부군에게 살해되는 것을 목도한 바르샤 팬들,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카탈루냐 주민들은 피가 끓는 분노를 한곳에 쏟아 부었다. 카탈루냐 깃발을 흔들며 카탈루냐어를 목청껏 외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바르샤의 홈경기장 ‘캄프 누’였다. 그 분노의 상대는 당연히 레알 마드리드였다.

 

 ▲ 엘클라시코 극장용 포스터 - 경기 당일 스페인 전역의 극장에서 ‘개봉’한다.

 

 

“이 썩을 영국 놈아, 우리 집안이 아일랜드 출신이야”

 

1996년 알카트라즈 감옥을 배경으로 한 영화 ‘더록’에서 테러범이 스코틀랜드 특수요원 출신으로 묘사된 숀 코너리에게 주먹을 날리며 내뱉은 말이다. 아마도 두 사람이 모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살고 있었다면 축구 경기장에서 맞부딪히지 않았을까. 치열함으로는 ‘엘 클라시코 더비’에 못지않은 ‘올드펌(Old Firm) 더비’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더해진다. 바로 종교다.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 글래스고에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기성용과 차두리가 뛰고 있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셀틱 FC’ 그리고 ‘FC 레인저스’다. 셀틱은 아일랜드에서 건너 온 이주민들이 결성한 클럽이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독실한 카톨릭신자들이며 정치적으로는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귀속을 요구한다.

 

반면 레인저스는 스코틀랜드 원주민들이 창설한 클럽으로 이들의 종교는 프로테스탄트(신교도)다. 이들에게 북아일랜드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 조차 못할 일이다. 올드펌 더비가 열리는 경기장은 초록색이 들어간 아일랜드 삼색기를 흔드는 셀틱 팬들과 영국 유니언 잭을 흔드는 레인저스팬들로 가득 찬다.

 

올드펌 더비는 북아일랜드 문제를 빼놓고 얘기할수 없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로서 가혹한 박해와 차별을 받았던 아일랜드는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오면서 마침내 1920년 독립을 쟁취해낸다. 그 과정에서 걸림돌이 된 것이 아일랜드 북쪽 6개 주였다. 문제는 영국에서 건너온 신교도들이 이 곳 인구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 이들 신교도들이 아일랜드에 통합되는 것을 목숨 걸고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충돌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이 6개주는 영국령에 남는 것으로 봉합되면서 아일랜드의 독립이 성사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 6개 주, 즉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던 아일랜드(가톨릭) 토착민들이 아일랜드 귀속을 위한 저항운동에 나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IRA(아일랜드 공화국군)의 급진파는 적극적인 테러 전술을 채택, 1980~90년대 영국 본토는 잇단 도심 폭탄테러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 셀틱과 레인저스의 올드펌 더비 모습

 

그렇잖아도 만만치 않은 역사적 배경에 핏빛으로 물든 현대사가 겹쳐지면서 올드펌 더비는 전쟁 그 자체가 되었다. 지금도 올드펌 더비는 양 팀 서포터즈의 충돌을 막기 위해 저녁도, 오후도 아닌 12시에 열린다. 경기장 안에서의 선수들 간 충돌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10년 동안 서포터즈 간의 직접적인 유혈사태로 사망한 숫자만 8명에 이른다. 그리고 이들은 누군가가 죽으면 경기 당일 화장한 유해를 경기장에 뿌리면서 전의를 다져왔다.

 

1988년 1월 2일, 영국 대표 팀의 주전공격수였던 레인저스 소속 폴 개스코인은 경기 내내 셀틱 서포터즈들을 향해 가톨릭과 성모마리아를 조롱하는 제스처를 내보였다. 다행히(?) 경기는 셀틱의 승리로 끝났지만, 분노를 참지 못한 일단의 셀틱 팬들이 당시 돈2만 파운드를 모아 IRA에 개스코인을 처단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시도까지 나왔다. 비록 살인청부가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자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면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을 이 퍼포먼스는 요즘도 축구 사이트에서 역사상 가장 정신 나간 세레모니 TOP10을 선정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일 것 같아 보였던 엘클라시코 더비에는 약간의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스페인은 풍부한 선수자원과 세계 최고의 리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월드컵이나 유로대회에서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어 온 것이 바르샤와 레알 소속 선수간의 불협화음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독설과 충돌만이 오갔던 양 팀 선수들 사이가 몇 년 전부터 눈에 띄게 화기애애해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서로 으르렁거렸던 마드리드와 바르샤 언론들도 서로간의 존중과 대표 팀으로의 단합을 촉구하는 여론을 환기시켜왔다.

 

그래서일까. 유로2008 우승에 이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승을 거머쥐면서 스페인은 과거 무적함대의 명성을 재현하고 있다. 남아공 월드컵 우승 당시 스페인 대표팀은 대부분이 바르샤 소속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마드리드의 대표 일간지 ‘마르카’는 스페인 대표 팀의 우승을 기념해 로고에 별을 새겼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길 꿈꾸는 바르샤의 홈구장 캄프 누(Camp Nou) 

 

반면 올드펌 더비는 세상 끝날 때까지 전쟁을 이어갈 기세다. 그동안 자기 팀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선수는 절대 영입하지 않았던 불문율은 깨졌다. 셀틱 입단 당시 많은 이들이 우려했지만 개신교 신자인 차두리와 기성용이 여전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일 뿐이다. 유럽축구연맹의 계속되는 징계 경고에도 불구하고 셀틱의 ‘IRA 찬가’와 ‘우리의 무릎에 피니언(셀틱 서포터)의 피가 흐를 것이다’라는 레인저스의 노래는 여전히 이들의 공식 응원가다. 지난해 4월 열린 올드펌 더비에서는 경기 전 닐 레넌 셀틱 감독에게 액체 사제 폭탄이 설치된 소포가 배달되면서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경계태세가 갖춰지기도 했다.

 

마오쩌뚱은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만약 이런 의미의 ‘정치’와 같은 게 있다면 엘클라시코와 올드펌 그리고 세계 곳곳의 각종 더비들이 아닐까. 누캄프 10만 관중이 엘클라시코 더비에서 내지르는 ‘떼창’은 ‘콜로세움의 검투사 경기를 가장 제대로 계승한 것이 축구’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켜켜이 쌓여있는 수많은 사연들을 안고, ‘정치’와 ‘전쟁’ 사이를 오가며 일상에서 볼 수 없는 긴박감과 흥분을 느끼게 해주는 엘클라시코와 올드펌, 앞으로도 영원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