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특검, 깜짝쇼는 일어나지 않았다

관리자
발행일 2008.04.19. 조회수 1709
스토리

삼성 특검팀이 어제(17일) 수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특검팀은 이건희 회장 등 삼성 그룹 핵심 임원들을 수천억원대의 조세 포탈과 혐의로 불구속기소한다고 밝혔습니다. 수사 대상이었던 계열사를 통한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및 검찰 고위간부에 대한 불법 로비의혹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한숨과 함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물론 특검팀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등 경영권 불법 승계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의 지시를 통해 구조본의 치밀한 기획과 실행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특검팀은 수사대상으로 제기된 대부분의 의혹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결국 수사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번 특검 수사의 핵심은 막대한 비자금을 어떻게 조성하고 이것이 어떻게 쓰였느냐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 지난 4월6일 언론보도를 통해 삼성그룹 구조본에서 관리하던 1,300여개 차명계좌 중 일부 계좌에 삼성전자가 2004년 8월 130억원을 입금하여 삼성전자 주식을 사들였고, 이로부터 나온 배당금은 전액 현금으로 인출되었음을 특검팀이 확인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차명계좌에는 어떠한 계열사의 돈도 입금된 적이 없으며, 모든 비자금이 상속재산이라는 삼성의 해명은 거짓임이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하지만 특검팀은 비자금이 이병철 전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이라는 삼성의 주장만을 인정하며 차명계좌에 있는 수조원대의 돈이 계열사에서 조성한 비자금이라는 의혹에 대해 별다른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삼성은 애초 김용철 변호사가 비자금 조성을 위한 차명계좌의 존재를 밝혔을 때 차명계좌 존재 자체를 강하게 부인했을 뿐 아니라 김용철 변호사에게 명예훼손 등의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바꾸는 삼성의 주장을 근거로 비자금 의혹을 무혐의 처리한 특검팀의 수사결과가 과연 납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불법로비 의혹에 대해 무혐의 처리한 수사결과도 상식에 어긋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이 처벌될 것을 각오하고 뇌물을 전달한 인사와 정황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의 경우 구체적인 물증까지 제시하였습니다. 수많은 전현직 검찰 고위직 인사들이 삼성그룹의 관리대상으로 적시된 가운데 이건희 회장이 로비를 직접 지시한 ‘회장 지시사항’ 문건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특검팀은 ‘관련 삼성 임직원들이 로비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으며,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리하였습니다. 지난해 12월 전군표 전 국세청장 뇌물수수 사건에 대해 검찰은 물증이 없었지만 뇌물 공여자의 주장을 직접 증거로 인정하여 전군표 전 국세청장을 구속 기소한 바 있습니다. 4개월여가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기에 특검팀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걸까요.

강도 높은 압수수색을 통해서도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특검팀은 이야기합니다. 당시 특검팀이 압수수색을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삼성은 주요 계열사들과 임원 자택에서 조직적으로 관련 자료를 파기하고, 소환 통보를 받은 대부분의 임직원들이 병가와 해외출장을 핑계로 소환에 불응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삼성화재 등 삼성의 주요 계열사들이 임직원들의 감독 하에 폐기물 업체까지 동원해 조직적으로 회사 관련 자료를 파기한 구체적인 정황까지 언론보도 등을 통해 드러난 바 있습니다.

당시 특검팀은 이러한 삼성의 조직적인 수사방해에 대해 삼성 측에 강도 높게 경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행태를 보인 삼성 임직원들이 이제 와서 로비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무혐의 처리의 사유로 말한 특검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건희 회장에 대한 불구속 기소는 특검팀이 법과 원칙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만인에게 공평무사해야 할 법 형평성마저 무시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큽니다. 특검팀은 이건희 회장을 양도소득세 1,128억원을 포탈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로 기소하였습니다. 조세 포탈의 경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연간 세금포탈 금액이 10억원이 넘으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과 포탈 세액의 2~5배의 벌금이 부과되며, 범죄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구속이 관행이었습니다. 이미 최태원 SK회장, 김현철 씨 등 수많은 정관계 인사들이 같은 혐의로 구속된 사례도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 차명계좌를 운용해 적극적으로 재산을 은닉하려 했고,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등에 개입하여 해당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포탈 금액의 규모뿐만이 아니라 범죄의 고의성 및 중대성 또한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삼성 특검팀은 “이번 사건이 재벌 그룹의 경영 및 지배구조를 유지, 관리하는 과정에 장기간 내재돼 있던 불법행위를 현 시점에서 엄격한 법의 잣대로 재단해 범죄로 처단하는 것으로 전형적인 배임, 조세포탈 범죄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며 이건희 회장을 불구속 기소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한마디로 관행에 대해 처벌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경제적 약자에게는 추상과도 같은 사법 당국의 칼날이 어쩌면 이건희 회장 앞에서는 이렇게 무뎌질 수 있습니까. 법과 원칙은 차치하고라도 그동안 수많은 재벌 총수의 사법적 판결을 보며 허탈해했던 대다수 국민들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실련은 이번 특검 수사결과에 대해 17일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성명서 작성은 사실 하루 전에 끝났습니다. 수사결과 발표 시점과 동시에 경실련 입장을 밝혀야 했기도 했고, 기사 작성 마감시한에 몰린 언론사들의 부탁이 있기도 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특검 발표 며칠 전부터 언론보도를 통해 수사결과에 대해 예측한 내용이 거의 다 나왔기 때문에 성명 작성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전날 성명서를 써놓고 검토를 위해 모니터를 보고 있는 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혹시 특검팀이 지금까지 언론에는 이렇게 흘려놓고 내일 깜짝쇼라도 하는 건 아닐까’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성명 제목을 바꿔보았습니다.                       



모니터에 꽉 찬 제목을 보니 잠깐이었지만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보같이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언제쯤 이런 성명을 쓰는 날이 올까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물론 다음날 이런 제목을 달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김건호 경제정책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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