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공명·정책선거 서포터즈] 선택할 권리

관리자
발행일 2017.04.21. 조회수 1363
칼럼

선택할 권리


김유니 (대학생 공명·정책선거 서포터즈)


 국민의 힘은 대단하다. 소수가 모이면 그만큼 큰 힘이 되지 못하지만 다수가 모이게 되면 되지 못할 것 같은 일들도 이루어내고는 한다. 17대 대선에서 우리나라의 연령대 투표율은 50대가 76.6%로 가장 높았고, 20대 후반이 42.9%로 가장 낮았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투표율도 높게 나왔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뽑힌 결과가 이명박 정부이다. 그 이후 쓴맛을 본 청년층들의 투표율은 급상승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지지율은 20대부터 40대까지 문재인이 약 1.5배 정도 높았다.

그만큼 지지율과 정치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진 탓이었다. 그러나 박근혜와 문재인이 서로 붙었던 18대 대선에서 차기대통령은 박근혜가 되었다. 왜일까? 지지율과 투표율이 동일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새누리당의 다양한 복지정책 공약은 사회적 약자들인 노인들을 향해있었다. 청년들을 향한 복지는 거의 없었다. 이들은 선거 때만 되면 재래시장이나 서민들이 많은 곳들을 찾아간다. 실제적 표심이 다 그곳에 몰려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그들이 유세하러 돌아다니는 것에 흽쓸리지 않고 본인들만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이 투표까지 미치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쓸모가 없다.

우리가 투표해야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이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것은 누구인가. 당연하게도 투표를 하지 않은 순으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나이가 어려지면 어려질수록 10대와 20대들은 그들의 타깃이 되어 선택의 결과를 비참하게 맛봐야 했다. 19대 여당의 반대로 무산된 직고용 문제가 20대 더민주 의원들의 힘으로 예산안이 통과된 적이 있다.

그로 인해 국회 소속임에도 대접받지 못했던 국회 환경미화원들이 국회 소속이 되어 정 규직원이 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리더를 스스로 뽑을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우리나라는 비로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참정권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는 완벽하지 못했다. 4.19혁명과 6월 민주항쟁을 기억하는가? 우리의 선배들은 정당한 투표권을 얻기 위해 피, 청춘, 땀을 바쳐야했다. 요즘 시기에는 뽑을 사람이 없다고 아예 뽑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마치 쿨해보이는 듯한 모습이지만 쿨함을 빙자한 무관심이고 방치이다. 소중한 것에 언제까지 쿨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우리나라에 만큼은 쿨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무관심이 더욱 뽑을 사람이 없게 만들고 정치판을 혼탁하게 만든다. 우리의 투표권이 높아지면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을 되새기면 투표의 중요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옛날에는 선택할 수 없었기에 그저 지도자가 바뀌면 바뀌는 대로 운명이 정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투표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데 왜 스스로 그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가? 곱게 차려서 받쳐놓은 밥상을 차버리는 꼴이다. 지금 현 시기로서는 더욱 각성하고 이번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다. 마치 현시국의 문제가 모두 그들의 탓 인 듯양. 그러나 지금의 이 시기도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충분히 바뀔 수 있었다. 이삼십대 젊은 연령층의 사람들이 지지라는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서 투표를 선택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아마 현시점보다 좀 더 많이 달라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른 척 그들의 탓만 하지 말라 그들을 가르키는 한 손가락이 아닌 나머지는 모두 우리를 향하고 있다. 미국의 할리우드 배우들은 투표를 독려하면서 vote or die 라는 글귀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하나같이 카메라 앞에 섰다. 중요한 것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들이 아닌 티셔츠 안에 써진 글귀가 뜻하는 바이다. “죽거나 투표하거나” 얼핏 보면 극단적인 듯한 태도이지만 그만큼 투표가 절실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그들 역시 투표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 국민이 투표하지 않는 나라와 의견을 피력하지 않은 나라의 끝은 결국 패망이다. 투표하기 위해 알아야 하고 알기위해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 투표는 착하고 투표를 거부하는 것은 나쁘다고 단정 짓는가. 제대로 알고 투표를 거부한다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가장 나쁜 것은 투표를 향한 무관심이다. 투표하지 않더라도 제대로 알고 거부하라. 하지만 우리의 정치에 대해서 그리고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다면 당신은 투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투표의 무관심이 부른 참극은 우리의 대선투표를 예정보다 빠르게 앞당겼다. 그리고 그 참극을 끝내기 위해 우리는 더욱 투표를 해야 한다. 기억하자.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거나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그에 합당한 결과도 역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 몫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정해지지 않은 희생자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나라가 망하는 길은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될 때이다.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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