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연극으로 읽는 고전] 죽은 햄릿의 영혼을 노래하다
죽은 햄릿의 영혼을 노래하다
셰익스피어 <햄릿> & 극단 뛰다 <노래하듯이 햄릿>
김상혁 정치입법팀 간사
noeul@ccej.or.kr
수많은 연극고전 중 햄릿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왠지 찝찝하다. 이 찝찝함을 조금 구체화하자면 마치 계란 넣지 않은 라면을 먹는 심심함과 장시간 외출 시 핸드폰을 휴대하지 않은 불안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는 책을 읽어야 하는 답답함을 섞은 것과 같다. 그렇다면 왜 여태껏 햄릿을 다루지 않았는지는 원작과 함께 보게 될 각색작을 위해서라도 굳이 변명을 해야겠다. 최근 1년 동안 햄릿을 다룬 연극이 별로 없었다(많이 다뤘지만 게을러서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해 ‘햄릿이야 뭐 뻔하지’ 하는 오만과 ‘언젠가 쓸 기회가 있겠지’하는 안일함으로 지금껏 미뤄왔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가 찾아와 극단 ‘뛰다’의 <노래하듯 이 햄릿>을 접하게 됐다. 이 작품을 통해 햄릿은 살아있는 작품이며 고전중의 고전이라고 반성하며, 개운치 않은 마음을 해소하고자 이번 호의 주제를 햄릿으로 정했다.
비극을 희극적 애도로 노래하다
원작 <햄릿>의 내용은 너무나 유명해 길게 썰을 풀지 않겠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하나로 햄릿의 아버지인 덴마크 왕의 죽음에서 시작해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모두가 죽는다고 비극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극적 상황에서 비롯된 햄릿의 잔인한 고뇌를 통해 한 인생을 밑으로 쭉 끌어 당기는 중력을 느낄 수 있다. 이 무게가 관객들을 집중시키고 있어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수많은 각색 이 이뤄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노래하듯이 햄릿>(이하 노·햄)은 다른 각색작과는 다른 주 인공 햄릿을 등장시킨다. 왕자로 자란 아이,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은 귀찮은 중생 같은 어린아이로 설정하며 햄릿을 희극적 인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죽은 햄릿의 얘기를 듣는다. 얼마나 한이 많으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