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스토리

필터
칼럼
[동숭동칼럼] 시민운동의 주인은 시민

[월간경실련 2022년 11,12월호][동숭동칼럼] 시민운동의 주인은 시민 윤순철 사무총장 6월 무더운 여름이었다. 종로5가 25-1 신탁은행 4층. 친구의 부탁으로 자료를 구하러 들린 사무실은 흡사 도떼기시장 같았다. 60평 남짓한 사무실에 80-90명이 북적였고, 다들 정신이 없이 바쁘고 분주하며 시끄러웠다. 요즘 말로 핫하다는 시민운동단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실 풍경이다. 당시 금융실명제 실시, 부동산실명제, 토지공개념 등 우리의 경제질서를 바꿨던 경실련의 정책들이 제도화 되던 때였다. 시사저널이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조사에서 경실련이 군보다 영향력이 세다고 나왔던 그 시절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유재현 사무총장님이 통일협회 사무처장을 맡고 계셨다. 학생운동을 하고 공장에 갔다가 겨우 주민등록증이 있는 정상인이 되어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였는데 경실련에서 통일운동을 같이 해보자는 유총장님의 제안을 주저없이 수용하였다. 사실 공장에서 나올 때 나름의 진로 원칙을 세웠다. 월급을 받을 수 있을 것, 전문성을 갖출 수 있을 것, 도망 다니는 일을 하지 않을 것, 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 조건이었다. 경실련이 그 조건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자리였다. 또한 세계의 온갖 술을 맘껏 마실 수 있다는 것이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당시 경실련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교포 청년들을 초청하여 세계한민족청년대회(GKN)를 매년 개최하였는데 12-13개국 청년들이 입국하면서 큼지막한 캐리어에 술을 가득 담아 왔으니 술 좋아하는 나로서는 천국과 같았다. 나의 경실련 생활은 1994년 7월에 시작되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지만 사무실엔 비행기 엔진 같이 큰 소리가 나 귀가 먹먹해졌던 큼지막한 에어컨, 책상마다 널브러져 있는 서류,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 천장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황소만한 쥐, 뿌연 담배연기와 수북이 쌓인 꽁초더미, 엘리베이터가 없어 출판물들을 4층까지 계단으로 낑낑거리며 등짐을 져 나르고, 매달 수천 장의 회비납부 지로...

발행일 2022.12.01.

칼럼
[동숭동칼럼] 경실련 30년, 시민운동, 경제정의

[월간경실련 2019년 11,12월호] 경실련 30년, 시민운동, 경제정의 윤순철 경실련 사무총장 지난 11월 4일, 경실련 창립 3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1989년 경실련은 시민 누구나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 가는 시민운동을 지향하며 실사구시의 자세로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며 우리 사회가 나아갈 합리적 정책 대안을 제시해, 모두가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민주공동체를 만들어왔다. 경실련 발기선언문(1989.7.8.)은 ‘우리사회의 경제적 불의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도시빈민과 농촌에 잔존하고 있는 빈곤은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박탈하고 있으며, 경제력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계층은 각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투기와 불로소득은 투자 의욕을 소멸하여 경제성장의 토대가 와해되고, 부익부 빈익빈은 양극화로 사회 안정 기반을 해치며, 비윤리적 축적은 공동체 규범과 윤리를 와해시키고 있다’고 당시 우리사회를 진단하였다.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만연한 정경유착, 부동산 투기, 재벌의 경제력 집중, 탈세, 불공정 노사관계, 농촌과 중소기업 피폐, 불공정한 소득분배와 같은 경제적 부정의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보았다. 더구나 무주택 세입자들은 뛰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17가족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던 때였다. 이 같은 상황은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암울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던 절망의 시기였다. 당시 재야, 학생,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이 불법과 폭력적 수단도 마다하지 않고 반정부적 행동으로 저항하던 시기에 경실련은 운동의 주체를 ‘시민’으로, 지향을 ‘경제정의’로, 법이 정한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운동하겠다고 나섰다. 많은 사람이 경제정의를 위한 시민운동을 보고 “과연 될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경실련은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시민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앞으로 매진할 따름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경실련은 시대적 과제로 ‘모든 ...

발행일 2019.11.20.

스토리
[릴레이인터뷰]여기 괜찮은 총각 있수다_신동엽 간사

경제정책팀 신동엽 간사 인터뷰 이 남자 심심하다. 분야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딱히 좋아하는 게 없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반지의 제왕’이란다. 음악적 취향은 차마 묻지 못했다. 대학로 인근에 거주하며 ‘낙산공원’ 한 바퀴 둘러보는 나들이 빼면 별다른 취미랄 것도 없다. 다만, 지금의 모습은 10대 후반에 이미 완성됐을 것이리라. 이 남자 삼삼하다. 다소 장황하고 고저장단이 없긴 하나, 사색이 깃든 화법을 구사한다. 솔직한 듯 단호하고, 담백한 듯 사려 깊다. 습관처럼 옹동그리는 입술과 차분한 눈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모의 초상은 사진보다 수묵화가 썩 잘 어울릴 것 같다. 정말이지 유명한 이름을 가진 남자, 경실련 경제정책팀의 신동엽 간사.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케 하는 1문1답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 경실련 생활을 어떤가? 신. 현재 경제정책팀에서 ‘재정/세제’와 ‘노동’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경제정책팀에 배치된 초반에는 ‘농업’과 ‘통상’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다른 팀원들과 업무를 분장하는 과정에서 변동이 있었다. 경제정책팀에서 보낸 시간이 석 달 조금 못 미쳤는데, 아직까지는 공부거리도 많고 일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 부산 참여연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부산과 서울, 참여연대와 경실련을 비교하자면? 신. 부산 참여연대에서는 지역의 현안 중심으로 늘 현장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런데 경실련에서는 마치 ‘연구원’과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미시적 현안에 집중해야하는 지역 시민운동과 거시적 정책을 다루는 중앙 시민운동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하고, 참여연대와 경실련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정. 서울에서 객지생활은 어떤가? 신.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전에도 서울에서 거주하며 일했던 적이 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고, 대학생활 때도 자취를 해서 생활 자체는 익숙하다. 다만, 집에서 어머니가 지어주시는 밥과 연로하신 부모님 생각에 쓸쓸할 때가 있긴...

발행일 2012.12.19.

스토리
"풀뿌리와 국제화, 두마리 토끼 잡아야" - 임현진 공동대표 인터뷰

"풀뿌리와 국제화, 두마리 토끼 잡아야"  임현진 공동대표(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인터뷰  진행_윤순철 기획총무팀 팀장 yunsc@ccej.or.kr 정리_안세영 회원홍보팀 간사 sy@ccej.or.kr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정부는 공공서비스를, 기업은 개별상품과 서비스를, 제3섹터인 NGO(비정부기구)와 NPO(비영리기구)는 ‘변화된 사람(Transformed Person)’을 창출한다고 말했다. 경제사회적 약자들이 자활의지와 역량을 갖추도록, 보편적 사람들이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회 구성원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민주화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와 시민의식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변화의 바람 속에서 임현진 공동대표(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학에서, 시민사회에서 합리적 비판과 발전적 제안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공공의 이익과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소통자적 역할에 매진해왔다. 또한, 학자로서 한국 풍토에 맞는 사회과학 이론 체계를 정립해가는 동시에 시민사회운동과 NGO연구에 평생을 쏟았다. 정년을 2년 앞둔 지금, 그의 인생을 계절로 표현하면 만추(晩秋)에 가깝다. 가을이 넉넉히 깃든 캠퍼스에서 임현진 대표를 만났다. '계급성’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시민운동  경실련과 임현진 대표의 인연은 첫걸음에서부터 시작됐다. 양견 교수(현 감사원장), 박세일 교수, 서경석 목사 등과 함께 경실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부동산 투기문제가 심화되고, 토지소유에 의한 불로소득으로 사회균형과 건전성이 훼손되어갈 때 사회적 잠재욕구가 경실련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경실련의 장점은 계급성을 넘어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계급적인 민중운동에서 보통 사람들 중심의 시민운동을 처음 시도했어요. 지지도, 비판도 있었지만 90년대 시민운동 연결망 중심에 경실련이 서 있었죠.”  임현진 대표는 경실련 외에도 정치, 환경, 사회복지, 역사, 국제교류 등 다양한 영역의 ...

발행일 2012.10.04.

스토리
[릴레이 인터뷰] 가치와 신념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윤순철 기획총무팀장

이기웅 간사가 만난 윤순철 기획총무팀장 18년째 경실련에서 시민운동을 이끌어온 윤순철 기획총무팀장. 아파트값거품빼기운동부터 대형국책사업 비리 폭로까지 건설 5적과 수년째 싸워오고 있는 그를 지난 6월 18일 상근자 대담형식으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시민활동을 경실련에서 시작하게 된 계기, 보람된 시민운동 사례, 경실련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롯해 신입간사를 비롯한 시민활동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 앞으로의 비전과 목표 등 활동가 선배로써 알려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진솔하게 말씀해 준 윤 팀장님은 삶, 그 자체가 곧 시민운동이었다.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솔직한 대담. 이제부터 시작한다. * 촬영기기 및 기술 부족으로 일부 음향과 화면 상태가 고르지 못한 점 미리 양해 말씀드린다. <인터뷰 18분 요약본> * 릴레이인터뷰는 인터뷰를 받은 상근활동가가 상대를 지목해 인터뷰하는 릴레이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현재까지  권오인 부장 → 최희정 수습간사 → 김삼수 팀장 → 안세영 간사 → 최승섭 간사 → 박한 간사  → 윤철한 국장 → 이연희 간사  → 남은경 팀장 → 이기웅 간사 → 윤순철 팀장 의 순서로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어 있습니다.

발행일 2012.07.06.

스토리
최정표 공동대표 인터뷰 “시민운동의 르네상스 열어야”

최정표 공동대표가 생각하는 시민운동의 방향과 재벌개혁 세대교체와 새로운 아이디어로 “시민운동의 르네상스 열어야”           대화는 경실련과의 인연에서부터 시작됐다. “창립멤버는 아니었지만, YWCA에서 열린 경실련 창립식 때 참석하면서부터 경실련과의 오랜 인연이 이어졌다”라고 운을 뗀 그는 “노태우정권 당시 전국적으로 땅 투기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 기업의 비업무용 토지 매각 등의 재벌 개혁방안을 추진하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최 공동대표는 강철규 전 공동대표, 장지상 경북대 교수와 공동으로 「재벌」이라는 재벌 비판서를 집필하며, 재벌개혁운동의 선구자로 나섰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경실련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지금은 머리가 희끗한 노교수지만 패기 넘치던 30대 중반부터 경실련 시민공정거래위원회 위원, 중소기업분과 활동, 정책위원장, 상임집행위원장까지 경실련의 주요 직책을 도맡아 수행하며 90년대 경실련의 힘을 키워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최 대표는 주저 없이 “교수가 제1의 직업이고 경실련 활동가가 제2의 직업”이라 말할 정도로, 경실련을 통해 많은 인연을 만나고 사회에 대한 철학을 확립했다고 한다.   그런 최 대표에게 MB정부의 4년 국정운영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그는 단호하게 “잘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MB자체가 국정철학이 없었다. 원전 수주와 같은 사안은 기업차원에서는 대단한 성과라 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국민의 행복과 안전이 우선시됐어야 한다. MB는 비즈니스맨의 범주를 못 벗어났던 것이 한계”라고 평가했다. 특히 경제측면에서 성과가 없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재벌을 통해 경제를 살리겠다며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지주회사규제 및 금산분리 완화, 감세 정책 등 온갖 방법을 써서 재벌과 유착했지만, 「가난한 집 맏아들」(유진수 지음,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보듯이 재벌은 자신의 이익만 챙길 뿐, 국가 경제를 돕지 않아 결국...

발행일 2012.05.21.

칼럼
시민의 자유와 부의 확대를 위하여

강철규 경실련 공동대표 (서울시립대 경제학 교수)  올해로 경실련이 출범한 지 19년이 됩니다. 변형윤 초대 대표님 이래 이종훈, 김성훈, 법등 전 대표님 등을 모시고 제 10대 공동대표로 취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경실련이 대안을 제시하는 합리적 시민운동의 효시로 89년 출범하여 그 동안 부동산 투기 억제, 재벌개혁, 금융실명제 도입, 부패추방 등 경제정의의 초석이 될 만한 일들을 많이 이룩하였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경제정의는 시민의 자유 확대와 부의 확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권교체 이후 작금의 현실은 그동안 애써 이룩한 경제정의의 틀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친기업적’이란 명목으로 기업의 긍정적인 측면을 북돋우는 것은 좋은 데 부정적인 측면까지 감싸고도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죽지도 않은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 하에 불공정 거래나 비리 등 타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까지 모두 묵인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7% 경제성장을 약속하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현재 우리경제의 상황을 고려하면 5% 이하가 정상입니다. 7% 성장은 불가능 합니다. 무리하게 추진하면 특정연도에는 가능해도 그 후 후유증이 심각하여 중장기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과거 70~80년대와 같이 투자기회가 많은 개발연대에는 9~12% 성장이 가능합니다. 현재 투자기회가 적은 선진국의 경우는 보통 1~3%의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과도기적 상황에 있는 나라는 4~5% 성장이 정상적입니다. 7% 경제성장 약속은 국민을 속이거나 죽지도 않은 경제를 살린다는 정략적 구호일 뿐입니다.    이외에도 아직도 건재한 재벌의 순환출자 등에 의한 편법지배를 묵인하려 하고, 형해만 남았으나 재벌견제의 상징성이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대안도 없이 폐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의 길을 트려하는 금산분리의 원칙 완화 등을 추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발행일 2008.02.01.

칼럼
진보와 보수, 그리고 경제정의

이대영 경실련 사무총장 2007년 12월 18일.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았다.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시작한 이후 30여년 가까이 소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미래가 오늘보다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언론사에서 전화가 왔다. ‘진보진영의 위기’ 또는 ‘시민운동의 위기’에 관해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사실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비로소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탄핵국면이라고 하는 다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긴 하지만 국회 의석도 과반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이제 개혁의 필요충분조건이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집권 초 삼성 임직원들을 불러다가 경제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실물경제를 잘 파악하기 위한 노력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경제 각료의 임명, 재벌기업 파견 직원들이 포함된 총리실의 규제개혁팀 운영, 개발시대 관료 출신들이 장악한 열린우리당 정책위 구성 등 개혁과 반대로 갈 수밖에 없는 인적 구성을 보면서 우려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는 재벌체제를 개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우리 경제발전에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의 문제로 보는 것 같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재벌의 경제력집중은 그 도를 더해갔고, 공정거래법 개정은 출자총액제한제를 사문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필생 역점사업인 지방분권 정책은 행정도시 건설, 공기업의 지방이전이라는 두 가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얻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담했다. 전 국토의 땅값이 치솟았고, 재벌 건설사를 배 불리는 각종 특별법 제정이 잇따랐다. 부동산은 폭등을 거듭해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불로소득이 창출되었다. 경실련은 지난 4년 내내 부동산문제와 씨름했다. 노무현 정권 덕분에 경실련 주가는 조금 올랐다. 그러나 반대로 경실련은 소위 ‘진보적인 노무현 정권과 싸우는’ 이상한 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

발행일 2008.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