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돋다] SF는 핑계고

회원미디어팀
발행일 2024.04.01. 조회수 25498
스토리

[월간경실련 2024년 3,4월호][BOOK돋다]

SF는 핑계고

- <천 개의 파랑>, 그리고 <나인> -

이성윤 회원미디어팀 팀장

 여러분은 SF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우주를 누비는 우주선이나 외계인, 시공간을 넘나드는 웜홀이나 타임머신, 혹은 기계가 점령해버린 인류의 모습 같은 것이 생각날 텐데요. 이러한 장면이 담긴 SF소설, SF영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장르입니다. 그런데 SF장르의 대표적인 작품을 말해보라고 하면 대부분이 해외에서 만들어진 영화나 소설들을 이야기할 겁니다. 예를 들면 <매트릭스>나 <스타워즈> 시리즈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러면 ‘우리나라의 SF 소설이나 영화가 없는 걸까’하고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흥행에 실패했지만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영화들도 있었고, 오래된 애니메이션인 <2020 우주의 원더키디> 같은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SF하면 단번에 떠올릴 만한 작품은 딱히 없었고, 흥행을 보장하는 주류의 장르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서점에 가면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소재의 SF소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SF장르의 대표적인 작가인 천선란 작가의 소설 두 권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인간보다 인간 같은, <천 개의 파랑>
 먼저 소개할 책은 <천 개의 파랑>입니다. 경마를 위해 만들어진 기수 휴머노이드 ‘C-27’,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말 ‘투데이’는 마지막 질주를 하고 있습니다. 둘 모두에게 마지막에 될 수 있는 한 번의 질주, 최후의 순간을 앞둔 ‘C-27’은 이 기적 같은 질주를 만들어 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C-27’, 훗날 콜리로 불리게 될 이 휴머노이드는 경마에 사용될 기수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제조과정의 실수로 학습 휴머노이드에게 들어가야 할 칩이 잘못 들어가게 되죠. 그래서 다른 기수 휴머노이드와 조금 달랐지만, C-27은 ‘투데이’라는 말을 만나서 신기록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혹사 당한 투데이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걸 눈치챈 C-27은 투데이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 낙마를 선택합니다. 아마 기수용 칩이 제대로 들어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죠. 그 사고 이후, C-27을 고치고 싶은 연재, 투데이를 살리고 싶은 은혜 자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데요. 자세한 줄거리는 책을 꼭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리겠습니다.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하면 죽음을 앞둔 말 ‘투데이’와 그를 위해 스스로 몸을 내던져 망가져버린 휴머노이드 ‘콜리’의 멋진 마지막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SF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저 인간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말과 휴머노이드를 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휴머노이드 같은 소재를 이용하고 있지만, 결국은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죠. 인류가 멸망하는 재앙적인 상황도 아니고, 외계인과 전투를 벌이지도 않죠. 이처럼 SF는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장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SF가 따뜻하다는 게 어색하다는 분들을 위해 따뜻함이 담긴 또 다른 SF소설 한 권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지구에서 피어난 아이 <나인>
 이번에 소개할 책은 <나인>입니다.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던 고등학생 ‘나인’에게 어느 날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손끝에서 새싹이 자라나고, 환영이 보이고, 식물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밤 환영인 줄 알았던 소년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렇게 나타난 승택은 나인에게 자신들이 지구인이 아닌 땅에서 자라서 피어난 누브라는 종족의 외계인이라고 알려줍니다. 이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가장 친한 친구인 ‘현재’와 ‘미래’에게도 선뜻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후 나인은 승택이 말한 사실들을 확인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가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나무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2년 전 실종된 학교 선배 ‘박원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박원우는 실종된게 아니라 살해당해서 묻혀있다는 것이었죠. 나인은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승택과 함께, 그리고 현재와 미래와 함께 이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요. 이 아이들은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역시 책에서 확인해보세요.

 <나인>은 <천 개의 파랑>과 다르게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이 외계인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나인’의 이모인 ‘지모’는 “신호등이 깜빡일 때 걷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버스를 탈 때 노인이나 아이를 위해 한발 양보하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다 내려야만 타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외계인이야”라고 말합니다. 농담 같은 이야기인데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외계인 같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는데요. 이처럼 소설에서 말하는 외계인은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수많은 존재 중에 하나일 뿐이죠. 이처럼 천선란 작가는 SF라는 장르를 이용하지만, 그 안의 본질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소외된 것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도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인상적인 점은 인간을 넘어서 동물과 식물까지 향하는 작가의 시선입니다. <천 개의 파랑>에서는 ‘투데이’를 통해서 갇혀 지내는 동물의 삶에 대해 보여주고, <나인>에서는 식물도 대화를 하고,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식물에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인간만이 아닌 지구에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SF라는 장르를 택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선과 이야기는 우리가 알던 SF와는 사뭇 다르지만, 이것 또한 SF입니다. 사람이 죽고, 외계인과 전쟁을 하는 절망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람을 구하고, 동물과 식물의 소리를 들으며 함께 미래를 꿈꾸는 이야기. 차가운 과학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닌 따뜻한 과학이 담긴 이야기. 우리가 알던 SF는 핑계고, 따뜻한 봄날처럼 따뜻한 이야기가 담긴 SF를 만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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