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모르고 쓰는 일본말 들통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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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07.26. 조회수 854
칼럼

[월간경실련 2024년 7,8월호][전문가칼럼]

모르고 쓰는 일본말 들통 내기

박만규 아주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이해마다 광복절이면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일본어의 단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말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우리말 속에는 아직도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일반의 예상을 깨고 놀랍게도 빨리 사라진 단어들이 있다. 예컨대 ‘벤또’, ‘와리바시’, ‘요지’ 같은 단어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각각 ‘도시락’, ‘나무젓가락’, ‘이쑤시개’ 등으로 대체되었다. ‘쓰봉’, ‘네지’, ‘와이로’ 등도 ‘(양복)바지’, ‘나사’, ‘뇌물’로 바뀌어 사라졌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국민학교’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민학교’란, 일제가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1941년 <제4차 조선 교육령>의 공포를 통해 만든 말이다. 일본은 패전 후 다시 ‘소학교’로 복귀했는데도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계속 쓰다가 1995년에 이르러서야 광복절을 앞두고 폐지를 결정하였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이후 이 말은 정말 놀라운 속도로 사라지고 대신 ‘초등학교’가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았다. IMF의 금 모으기 운동에 버금가는 국민 단합의 예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우리 생활에서 여전히 폭넓게 쓰이고 있는 단어들도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곤색’이다. 특히 옷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면 여전히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단어는 참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단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짙은 남색을 뜻하는 말인 ‘곤색’(紺色)은 사실은 일본식 한자어가 아니다. 이는 중국 오대의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도 나오는 한어(漢語)계 한자어 ‘감색’(紺色)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감(紺)’을 일본어식 발음 ‘곤’(こん)으로 읽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감색 양복’과 같이 ‘감색’이라고 순화하여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감색’이라는 단어도 별로 안 좋다. 먹는 ‘감’의 색깔, 즉 주황색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어릴 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감색’(紺色)은 ‘어두운 남색’을 가리키는 말이니 ‘검남색’이나 ‘진남색’으로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남색’은 어떤 색일까? 이는 ‘푸른빛을 띤 자주색’(표준국어대사전), 또는 ‘파란색과 자주색의 중간색’(고려대 한국어대사전)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러니까 ‘남색’은 완전 ‘청색’보다는 자주색이 조금 포함된 색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은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다. 여기서 ‘쪽’은 예로부터 푸른색을 뽑기 위해 천연 안료로 쓰는 식물인데, ‘람’(藍)색이 여기서 유래한 색이다. 그러니까 ‘쪽’에서 ‘람’(藍)을 뽑아내는데, 보통은 이것이 ‘청’(靑)보다 아무래도 덜 푸를 수밖에 없다. 다만 가끔씩 예외적으로 푸른색보다 더 푸른 경우가 있어서 이러한 경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난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색깔에 관한 일본어가 하나 더 있다. ‘소라색’이다. 이것도 일본어 ‘空(そら)色’에서 온 말로, ‘소라(そら)’는 하늘을 뜻한다.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소라 고동 할 때의 소라인 줄 알고 그 색깔이 하늘색인가 하고 의아해했었다. 우리나라에는 하늘이 없나?! 이제부터 ‘하늘색’이라 하자.

 이처럼 우리말 속에는 일본말인 줄도 모르고 쓰는 것들이 많이 있다. ‘뽀록을 내다’, ‘뽀록이 나다’라는 말이 그 한 예가 된다. ‘뽀록’이라는 말은 언뜻 고유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본어 '보로'[ぼろ(襤褸)]에서 온 말이다. ‘보로’는 ‘넝마, 누더기, 허술한 데, 결점, 낡은 것, 고물’ 등을 뜻하는데, ‘내다’를 뜻하는 동사(だす)와 결합하여 ‘결점을 드러내다; 실패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우리도 ‘뽀록을 내다’처럼 쓰고 있다. 이 대신 ‘들통을 내다’와 같이 쓰면 좋겠다.

 ‘뽀록’이 나오면 연이어 생각이 나는 말이 ‘후로쿠’이다. 그런데 이는 순수 일본어가 아니라 ‘요행, 행운, 우연’을 뜻하는 영어 fluke(플루크)가 기원인 일본식 영어(フロック)인데, 이것이 우리말에 들어온 것이다. 발음도 ‘후로쿠’로 일본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당구 같은 경기에서 안 맞을 공이 요행으로 맞은 경우에 주로 쓰고 있다.

 일본어에서 들어온 영어 기원어 중 우리가 흔히 쓰는 ‘엑기스’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식물 등 원재료에서 추출한 물질이라는 것을 뜻하기 위해 ‘추출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영어 '엑스트랙트(extract)'로부터 일본어식으로 발음한 '에키스토라쿠토((エキストラクト)'를 앞의 3음절을 따서 축약한 말이다. 추출액이나 농축액 혹은 진액 등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 ‘엑기스’는 주로 소위 ‘피로회복제’로 개발되어 팔린다. 그런데 ‘피로 회복’이라는 말도 어법에 맞지 않는다. ‘회복’은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다는 뜻이다. ‘기력 회복, 건강 회복, 질서 회복, 신뢰 회복’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앞의 명사가 나타내는 것(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로 쓴다. ‘체력, 명예, 원기, 신용, 인간성, 도덕성’ 등도 ‘회복’과 함께 쓰이면 되찾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일 ‘피로 회복’이라고 한다면 ‘피로를 되찾는다’는 말이 되어 정반대의 뜻이 돼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로를 회복한다’는 말을 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 한다고 하면 틀린 말이 되는 것이다. ‘피로를 푼다’는 표현이 올바른 것이다. 그러므로 복합명사를 만들려면 ‘피로 해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피로해소제’가 나오면 사서 마시고 ‘피로회복제’라고 쓴 것은 마시지 않는 것이 어떨까? ㅎㅎ

 ‘후로쿠’, ‘엑기스’와 같은 일본식 영어의 유입은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또 다른 예로 ‘컨닝’(cheating)과, ‘샐러리맨’, ‘프론트’(reception desk), ‘에어컨’(air conditioner), ‘스킨십’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일본어 혹은 일본식 표현이라고 하여 그것들을 무조건 배척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말에 기존의 단어가 있거나 대체할 만한 표현이 있을 경우에는 가급적 우리말을 쓰자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은 ‘컨닝’은 ‘부정행위’, ‘에어컨’은 ‘냉난방기’, ‘샐러리맨’은 ‘봉급생활자’로 순화어를 제시하고 있는데, 제시된 순화어들을 잘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해마다 광복절이면 우리가 힘없고 어리석어 국권을 빼앗겼던 과오를 되새기게 된다. 다행히도 최근의 대한민국은 문화와 체육, 학술 등 모든 분야에 있어 반만년 역사 중 가장 화려하게 한민족의 긍지를 드높이고 있다. 그러나 안보 문제만큼은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둘러싸여서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의 민족 정기를 잃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정신의 핵심은 언어에 있다. 인간은 오직 언어를 통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를 잘 다듬고 보살펴야 할 것이다. 외래어는 해당 우리말 어휘가 없을 때 우리말의 표현력을 풍부하게 하는 순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자각없는 무분별한 수입은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몰아내는 역기능을 수행할 때가 많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일본어에서 온 어휘의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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