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종 김치, 뫼비우스 띠, 그리고 만남_노귀남 미시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관리자
발행일 2013.03.27. 조회수 662
칼럼

  

정종 김치, 뫼비우스 띠, 그리고 만남


 


-변경문화를 찾아서-


 


노귀남 미시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단둥 한글간판.png


 


중국 재래시장에서 김치를 직접 담가서 파는 한국 사장을 만났다. 그는 한족 시장바닥에서 원조 김치격인 ‘정종 김치’로 성공하고 있다. 정종(正宗)이란, 중국에서는 정통, 원조, 전통의 뜻을 가진다. ‘원조’를 붙여 시장 쟁탈을 하듯이, 정종이란 말을 써 붙여 가짜가 아닌 어떤 정통성을 광고한다.


 


그 사장한테서 김치 담그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종 김치’는 중국식 김치가 된다. 이 김치는 중국사람이 만든 것과는 맛과 질이 달라 정종 김치로 인정받고 있다. 대개 중국사람은 절인 배추에 고추장을 넣고 김치를 담그는 줄 알 정도로 원조 김치를 잘 모른다. 시장에서 파는 중국식 김치를 보면 고추의 붉은 기운이 죽어 거무칙칙하다. 설탕 대용으로 쓰는 ‘탕진’이 맛과 색을 변형시켜 도무지 김치맛이 나지 않는다.


 


단동거리의 조선사람 (2).png   


 


그 사장은 처음에 한국 원조 김치를 담가서 재래시장판에 나갔다. 팔긴 했지만 맛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단다. 입맛이 달랐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중국 입맛을  찾아내 맞춰 나갔다. 그곳 사람들은 젓갈이 아주 조금만 들어가도 그 비린 맛이 거슬린다고 하여 그것을 대용할 재료를 찾아야 했다. 또 단맛을 좋아한다고 설탕으로만 대신하면 안 된다. 마늘보다 생강을 많이 써야 한다. 이렇게 조금씩 맛을 개선하면서 그 바닥 시장에서 최고의 맛으로 승부할 수 있었다. 물론, 신 김치는 거의 팔리지 않아 재고를 남겨도 안 되지만, 1근(500g)에 8원씩 하는 김치가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란다.


 


그의 사업은 김치장사만이 아니다. 김치전, 떡볶이, 김밥 등과 함께 한국식 밑반찬과 한국 일용상품, 전자제품, 화장품 등 종합상사가 부럽지 않게 노력했다. 처음에는 중국말도 잘 못하면서 시작한 김치 장사가 3년차 접어든 지금에는 만만찮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동의 한글간판(5).png


 


그것은 일상과 현장에서 중국의 사람과 문화를 파고드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치시장도 지역마다 다를 수 있다고 한다. 매일 힘들게 김치를 담그는 노력보다 조선족 김치공장의 김치를 받아서 팔면 어떠냐고 했더니, 이윤도 문제려니와 지역 입맛을 따라가지 않으면 승부할 수 없다는 대답이다. 여기서 식당을 하거나 하는 한국인들이 대개 중국 사람을 상대로 하는 시장을 잘 개척하지 못하는 것과 대비하면 그가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말로는 지금 중국은 김치 맛에 중독이 되었단다. 음력 설날인 ‘춘절’이면 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부위별로 떼어서 한 달 내내 먹다가, 음력 2월 2일 ‘용이 머리를 드는 날’(龍擡頭)인 ‘춘룽제’(春龍節)에는 마지막 귀를 떼어먹고 머리를 깎는 풍습으로 춘절기간 축제가 끝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내 고기를 먹기 때문에 일반 서민이 한번에 20원어치는 보통이고, 흔히 70-80원어치도 사 가서 친척들과 나눠 먹는단다. 2,3천원의 공장 노임을 생각하면 적잖은 돈이다.


 


  단동의 한글간판들 (2).png  



한국에도 춘룽제는 소개된 바가 있다. 춘룽제 이전에 머리를 깎으면 한 해의 복이 날아가지만 이날에 머리를 자르면 액과 불운이 함께 떨어져나가 일 년 동안 평안하다는 풍습에 따라, 날짜 맞춰 머리를 자른 사람들의 ‘인증샷’이 봇물을 이룬다. 단동에 살면서 이런 소리를 듣고 보았지만, 그 긴긴 명절에 김치가 필요하다는 말은 별로 못 들었다.


 


그러면서 중국은 우리와 김치 문화가 다르다. 술과 함께 군것질 하듯이 나물 느낌으로 즐겨 먹으니까 짜지 않으면서 달아야 된다. 한국 사장은 지역 맛을 낸 김치를 한족들이 모두 “정종맛”이라니 재미있단다. 그런데 사장이 먹는 김치는 따로 한국식으로 담가서 먹으니 더 재미있다.


 


 단동의 한글간판들 (3).png


 


사장이 한 발상의 전환 자체가 김치 본래의 맛이란 생각이 들었다.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가 있다. 긴 종이 띠에 가로로 중앙선을 그은 다음, 반쯤 비튼 상태로 양 끝을 이어붙이면 모양이 한 번 꼬인 원형 모형을 만들 수 있다. 한번 꼬인 도형이기 때문에 중앙선을 쪽 따라가면 겉면이 안쪽이 된다. 이 안쪽을 따라서 쭉 같은 방향으로 가면 다시 출발점인 겉면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니까 안과 밖이 따로 구별이 되지 않으면서 안이 되었다가 밖이 되었다가 한다. 또 그냥 당기면서 보면 끝없이 겉만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안팎 구별이 없는 대표적인 도형인데, 이것을 비가향적(非加向的, non-orientable)이라 한다. 즉 안이면 안, 밖이면 밖의 어느 한쪽의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형태란 말이다. 김치 본래의 맛도 이처럼 비가향적이다. 심지어 같은 김치가 날마다 맛이 달라 맛의 편견을 갈아치운다.


 


단동거리의 조선사람.png


 


뫼비우스 띠는 또다른 흥미로운 성질이 있다. 이것을 납작하게 하면 삼각형 모양이 나온다. 이 띠를 중심선을 따라 쭉 잘라 들어가면 두 개의 띠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두 번 꼬인 한 개의 띠가 된다. 이것은 처음 길이의 두 배가 되는데, 납작하게 하면 8자 모양의 두 개의 삼각형이 동반된다.


그런데 띠의 중심을 따라 1/3씩 평행한 두 줄로 동시에 잘라 들어가면 두 개의 띠로 분리된다. 하지만 두 개가 서로 고리를 이루면서 떨어지지는 않는데, 하나는 처음 것과 동일한 길이의 띠가 되고, 다른 하나는 두 배로 긴, 두 번 꼬인 띠가 된다. 원형과 변형! 여기서는 중심에서 약간 비껴서는 1/3선이 비결이다! “중심에서 약간 비껴선” 것, 하여, 정종은 없다. 오리지널 김치는 없다. 주장하고 싸울 중심이 없다.


 


김치의 생명은 그래서 국경을 넘는다. 


 


 단동의 한글간판들 (4).png


 


거기에 남는 것이 있다면 김치 유산균과 손맛이 있고, 김치 생명과 문화가 있다. 그 한국사장 가게에는 '정종 한국 상회’라는 한글 때문에 정종 한국산을 좋아하는 사람, 중국말을 몰라 길을 묻는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국적 불문, 한국말이 통하면 그냥 김치처럼 버무려진다.


 


문득 이 현장처럼 통일은 비비며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단 이데올로기에 갇힌 편견들보다 이런 생생한 만남의 장에서, 한 잔 얻어 마시는 ‘한국커피 믹스’로 텁텁한 입맛을 잠시 가신다. 하지만 갖가지 이유로 돈을 벌려고 나온 사람, 거기서 살아남는 사람, 어정거리는 사람…… 말이 통해서 잠시라도 정거장이 되어주는 그 상회의 주인조차, 한 치의 자리라도 지켜내야 하는 시장이라는 날선 풍습을 인내하고 이기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속에서 말이 이어주는 인정의 단비가 용의 비늘 밑에 운우(雲雨)가 피어나듯이 요즘 같은 답답한 남북의 국면을 촉촉이 적셔주길 바랐다. 약간 비껴서 보자고 그래서 부디 타협해 보자고.

첨부파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