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문화정보프로그램의 허와 실

관리자
발행일 2005.11.16. 조회수 2231
사회

<들어가며>


“사람을 생각하는 방송, 미래를 준비하는 방송” EBS(교육방송) 홈페이지에 나오는 이 문장은 이 방송국의 정체성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어린이들의 꿈은 물론 다수의 희망과 소수의 바람까지 모두 귀 기울이는 방송, 모든 국민에게 배우는 즐거움과 희망찬 미래를 선사하는 방송. 다시 말하면 학창시절이 지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EBS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채널에 불과하다는 의미도 된다.


사실 EBS가 제작하는 많은 프로그램들은 수준의 저하에 상관없이 대중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능전문방송’이란 명칭은 시청자들에게 재미없고 고루한 방송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시청률이라는 일방적인 잣대로 평가하기에는 EBS 프로그램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이 많이 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자신들의 문제점을 뻔히 알면서도 제작진은 현상유지에만 급급할 뿐, 적극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경실련 MEDIA-WATCH 대학생 모니터팀 ‘미모사’에서는 지난 10월에 방영되었던 EBS의 대표적인 문화정보프로그램 ‘시네마 천국’과 ‘애니토피아’를 중심으로 모니터를 실시하였다. 대체로 바람직한 부분이 많았지만 치명적인 문제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목할 부분은 장점과 단점이 서로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칼의 양날처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들을 보아야 하는 이유>


1) 문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의 함양 - ‘시네마 천국’


“영화를 통한 세상 보기‘를 모토로 1994년 3월부터 매주 금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방송을 하고 있는 ’시네마 천국‘은 대표적인 영화정보프로그램이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MBC의 ‘출발 비디오여행’을 비롯한 타 방송국의 영화정보프로그램들이 지나치게 신작이나 흥행작 위주의 영화소개에 치우치는 반면, ‘시네마 천국’은 매주 특정한 테마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내용 위주의 소개를 하는 점이 특색을 보인다. 그리고 각 영화에 대한 비평적인 관점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대중적이지 않다는 한계를 가지고는 있지만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획일화된 여타의 영화정보프로그램과 비교해볼 때, 다양한 정보 전달이라는 본연의 취지에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10월 21일 방영분을 보면, 이러한 차이점을 극명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출발 비디오여행’에서 소개되는 영화의 수가 평균적으로 11편 정도인데 비해, ‘시네마 천국’은 동일한 편성시간임에도 20편이 넘는 영화를 소개하였다. 특정한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떠벌리기 보다는 여러 편의 영화를 묶어서 설명, 영화가 지니는 다양한 의미에 대해 시청자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는 점에서 결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프로그램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보였다. 또한 신작영화에 대한 소개는 예술영화로 서울 기준 단 두 개의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카페 뤼미에르’라는 작품 한 편에 국한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같은 주에 방송된 ‘출발 비디오여행’의 경우, ‘사랑해 말순씨’, ‘야수와 미녀’, ‘플라이트 플랜’ 등 흥행성 있는 신작영화들을 중심으로 소개한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프로그램이 하는 것을 따라하지 않겠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엿보였다.


2) 전문성의 강화 - ‘애니토피아’


매주 목요일에 방영되는 ‘애니토피아’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일반인들의 선입견을 깰 것을 주장하는 프로그램이다.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애니메이션의 감상 기회를 제공하고 애니메이션이 단순한 ‘만화영화’가 아닌 독립된 영상예술의 한 장르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노동과 자본 집약적인 영상산업의 한 분야인 애니메이션의 매체적 특성이 잘 드러나도록 한국 애니메이션 분야의 인력, 스튜디오 소개를 비롯한 일반인들이 잘 알기 어려운 것들의 소개를 통해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10월 20일 방영분에서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 특별 전시회를 소개하였는데,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독립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알렸다는 점에서 신선한 기획이었다. (‘애니웨어’ 코너)


10월 13일 방영분에서는 이러한 전문성이 특히 잘 드러났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 ‘유령 신부’의 개봉에 맞춰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소개와 함께 팀 버튼이라는 감독이 지향하는 이미지나 인물의 형성과정이 디즈니를 비롯한 여타의 애니메이션들과 가지는 차이점과 특성에 대하여 초보자들도 접근이 쉽도록 자세하게 설명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누구냐? 너!’ 코너의 ‘팀 버튼의 캐릭터‘ 편)


3) 진행자는 각 분야의 전문가
 
이 프로그램들은 연예인이나 전문MC가 아닌, 실제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감독이나 배우들이 진행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프로그램의 전문성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애니토피아’는 CF와 영화감독인 용이와 애니메이션 감독인 민동현이, 그리고 ‘누구냐?너!’코너의 진행을 현직 애니메이션 감독인 유대영씨가 맡음으로써 전문성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시네마 천국’에서는 영화배우 배유정과 영화감독 최동훈이 각각 진행을 맡고 있는데, 자신들이 직접 겪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다른 프로그램들과 명확한 차별성을 긋고 있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들을 볼 수 없는 이유>


1) 재미가 없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네마 천국’은 11년 묵은 장수프로그램이고, ‘애니토피아’도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오래된 프로그램들이 가지는 치명적인 문제점은 더 이상의 새로운 시도나 아이템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디어 고갈의 문제점일 수도 있고, 매너리즘에 빠진 것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들 프로그램들이 더 이상 새로운 시청자 층을 개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전통이 있고 좋은 내용을 담는다고 할지라도, 시청자가 외면하는 프로그램은 그 당위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EBS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네마 천국’의 경우에는 다른 영화 정보 프로그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무척 지루해 보인다. 아무래도 영화 한 편을 길게 소개하기보다 해당 주제에 맞는 영화를 잠깐씩 언급하면서 지나가기 때문에 삽입되는 장면들이 길지 않고 몰입하기가 힘들고, 따라서 시청자의 시선을 붙잡을만한 임팩트가 상당히 부족하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문화이지만 최고의 오락상품인 영화에 대해 지나치게 진지한 관점만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9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산업적 성취가 커지고 대기업의 영화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면서 영화는 지나치게 쉬워지고 재미에 집착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영화를 보는 사람은 즐겨서 보고, 아닌 사람은 아예 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멀티플렉스, 위성 방송, 인터넷의 확산으로 누구나 쉽게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화를 보는 숫자는 늘어났지만, 영화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계층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영화를 패스트푸드처럼 먹어치우는 현실에서 ‘시네마 천국’이 걸어가는 길은 어찌 보면 교육방송으로써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나치게 ‘몇 몇 마니아들만의 잔치’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에 비하면 ‘애니토피아’는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리모컨을 고정시킬 만큼의 집중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소재나 주제등이 충분히 흥미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다소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장점을 지적한 전문 진행자의 진행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깊이를 담보할 수는 있겠지만 자칫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는 면에 있어서는 다소 부족한 것은 아닌지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2) 몇가지 아쉬운 점들


EBS의 프로그램들이 다른 공중파와 비교할 때 아무래도 제작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제작비의 한계라고 말하기엔 무성의한 부분도 많이 나타나고 있어서 아쉬웠다. ‘애니토피아’ 10월 13일 방영분을 보면, 자막이 과도하게 사용되는 등 전반적인 화면 구성이 조악한 특징을 나타냈다. 그나마도 자막에 여러 가지 글씨체를 혼용하여 가독성과 집중도를 떨어뜨렸다. 예를 들어, 강수진의 동료들의 인터뷰 부분에서(‘애니웨어 코너’) “성우 강수진은 이런 사람?”이라는 반복되는 질문을 반복해서 자막으로 처리한다거나, 코너 사이에 코너 진행과 관계없는 시사회 초대 관련 자막이 나가는 점, ‘애니를 만나다’ 코너에서 어색하게 “이 분은 한병아 감독님입니다”라는 말풍선을 한병아 감독 뒤편에 위치한 백곰 입 부근에 편집해 넣은 장면은 눈에 상당히 거슬렸다.


또한 전문성을 가진 진행자의 영입은 칭찬할만한 일이지만,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가고 시청자들에게 화두를 제시해야할 진행자로서의 기본 자질이 결여되었다는 느낌을 심하게 받았다. ‘시네마 천국’ 10월 14일 방영분을 보면, 공동 진행자임에도 불구하고 배유정은 시종일관 최동훈에게 ‘감독님’이라는 경어를 사용함으로써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게다가 방송경력이 없는 최동훈은 어색하고 교과서를 읽는 것 같은 진행을 함으로써 매끄럽지 못하고 딱딱하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다. 물론 유창하고 매끄럽지만 알맹이가 없는 진행보다는, 전문성을 가진 진행자의 어눌하지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이미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발성이나 진행방법에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기용한다는 것은 시청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저버린 처사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은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한다면 제작비의 추가 없이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아쉽다.


<마치며>


말초적이며 자극적인 내용들이 판을 치는 요즘 공중파의 분위기 속에서 문화에 대해 진지하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해주는 프로그램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오래 고인 물은 썩어들기 마련이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프로그램의 설자리는 없다.


이제까지 ‘시네마 천국’과 ‘애니토피아’가 끼친 영향력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목요일과 금요일 밤 12시라는 두 프로그램의 방영시간은 이들이 현재 처한 위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라고 생각된다. 마냥 전문성을 취하기에는 더 이상 떨어질 시청률도 없고, 그렇다고 대중적인 내용들만 보여주기에는 그동안 쌓아올린 업적이 너무 아쉽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방송의 최우선 존재이유는 바로 시청자이고, 그런 시청자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는 그리 심한 것 같지는 않다.


대중성과 전문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제작진이 열의를 가지고 지금보다 더욱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의 : 미디어워치 02-3673-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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