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기-행] 천 년의 도시, 백 년의 포구

회원미디어팀
발행일 2024.07.26. 조회수 861
스토리

[월간경실련 7,8월호][윤서기-행]

천 년의 도시, 백 년의 포구

- 경주시 감포항 -

최윤석 회원

 

 2년 전 늦여름이었다. 모처럼 긴 휴가를 받아 동해로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울산에서 출발해 강릉까지 가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시일이 다가올 때쯤 태풍 상륙 소식이 들려왔다. 요즘 가장 핫한 어떤 장성이 장갑차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바로 그때 그 태풍이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기왕에 정해진 휴가를 방구석에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대륙을 달렸는데 비바람이 대수냐, 무작정 울산행 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욱여넣었다.

 그러나 울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초속 7~10m 육박하는 바람이 앞길을 막았다. 그래도 첫날은 어찌어찌 겨우 달렸는데 다음 날이 문제였다. 새벽의 적막을 부숴버리며 장대비가 요란하게 내리고 있었다. 로비 처마 밑까지 사선으로 짓쳐 들어 온 굵은 물줄기에 맥없이 꺼져버리는 담뱃불을 망연히 바라보며 주행을 포기했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하루를 보내게 된 곳이 감포항이었다.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곳, 더군다나 이동 수단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뭘 하며 하루를 보내야 할까. 싶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걸음을 뗀 지 얼마 안 가 나는 이 작은 항구에 매료되어 버렸다. 차라리 그 악천후가 요행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동의 제약은 오히려 두 발을 자유롭게 했다. 전체 일정을 고려해 더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도(古都)의 이 뒤편을 언젠가 꼭 다시 찾아야겠거니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다섯 개의 등대
 금요일 오후, 이른 퇴근 후 쉬지 않고 네 시간여를 달려 감포항에 도착했다. 내해를 끌어안듯이 쭉 뻗어 있는 동방파제 끝으로 독특하게 생긴 하얀 등대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잘 찾아왔거니. 말은 저렇게 했어도 그때 지나갔던 동해의 항구가 어디 한두 개여야지.

 아닌 게 아니라 감포항 답사는 등대에서 시작해서 등대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은 항구에, 암초 경보용 소형 등대를 제외하더라도 커다란 등대가 다섯 개나 있다. 그중 세 개는 방파제 끝에 있다. 감포항은 동남쪽으로 열린 ‘ㄷ’자 형태의 항구이다. 그 ‘ㄷ’자의 북쪽 끝에서 하나(북방파제), 남쪽 끝에서 두 개의 방파제(서방파제, 동방파제)가 뻗는다. 그리고 이 각각의 방파제 끝에 등대가 하나씩 서 있다.

 육지에서 뻗은 등대라면 본디 바다와 땅의 경계를 알리는 것이 제 임무일 터, 그렇기에 등대 하나하나를 찾아가다 보면 가장 극적인 곳에서 각기 다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대양을 맨 앞줄에서 맞닥뜨리며 척후병처럼 우뚝 선 등대들을 보다 보면, 어째서 인류의 위대한 정신들이 등대를 생애의 의지에 비유했는지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자리하고 있는 장소도 장소지만, 등대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피사체이다. 특히 서방파제 등대와 동방파제 등대는 완전히 같은 모양의 쌍둥이 등대로, 인근에 있는 감은사의 동서 쌍탑을 사이좋게 하나씩 음각하고 있다. 당연히 그 안에는 늘 새로운 풍경이 채워져 있다. 긴 우기 중간에 마른하늘이 담긴 등대를 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운이 참 좋았다.

 다른 두 개의 등대는 항구 북쪽 언덕 끝에 자리하고 있다. 과거 감포항 뒷산에서부터 이 언덕(臺) 끝(末)까지 소나무(松) 군락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육지의 끝인 그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등대는 그래서 ‘송대말(松臺末)’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감포항에서 가장 각광 받는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웃자란 소나무들 사이로 넘실대는 창해를 바라보는 일은 감포 답사의 백미 중의 백미다. 믿거나 말거나, 해질녘 바다에 길게 드리운 소나무 그림자를 먹이로 착각한 물고기들이 게으른 태공의 안줏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과거에 쓰이던 그 무인 등대는 지금은 등대로서의 의무에서 자유로워졌다. 대신 바로 옆에 세워진 다른 등대가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일반적인 등대와 달리 복합적인 용도로 건축되어 윗부분은 등대의 역할을 하되 아래 1, 2층은 ‘빛 체험 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등대와 감포, 그리고 경주의 역사를 테마로 한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를 전시하고 있다. 여행에 앞서 먼저 이곳에 들러 감포의 내력을 간추려 보는 것도 좋으리라.

사연 많은 해국길
 많은 이들이 역사의 흔적을 쫓아 경주를 찾는다. 그 시선은 대개 고대, 더 나아가도 중세를 벗어나지 않는다. 감포는 다르다. 1925년 개항한 감포항의 가장 짙은 나이테는 근대에 새겨졌다.

 감포항은 일제가 전략적으로 증축한 항구이다. 그런데 사실 항구로서의 입지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전통적인 곡창지대도 아닐뿐더러 인근에 이미 구룡포항, 양포항 등이 있는 마당에 부러 자원을 투입할 이유도 딱히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경제 논리 이면의 또 다른 내막이 숨어있을 터. 누군가는 일제가 천년고도의 경주에서 문화재를 손쉽게 밀반출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해안인 이곳에 항구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는 해석인데, 감포항에서 불과 10여km 떨어진 곳에 잠든 문무왕이 왜적을 막기 위해 호국룡이 되고자 했다는 고사를 생각하면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또 없다.

 이 시기 감포읍의 인구는 팔천 명 정도, 그중 일본인이 이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읍장부터 시작에 주요 요직을 독점한 것은 물론이고, 저인망을 이용한 마구잡이식 어업으로 어족자원을 갉아먹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일제의 무지성적인 감포 활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 송대말 등대 아래에 있는 해상 수족관이다. 말 그대로 바다에 있는 수족관이다. 송대말 아래로 넓게 암초군이 형성되어 있는데, 당시 일본인 재벌 오다 도모기지라는 인물이 암초들 사이에 콘크리트로 벽을 세워 여러 개를 폐쇄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관상용 어류를 양식했다고 한다. 근처에 별장도 하나 세워 유지들과 고상한 취미를 즐기기도 했다고.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 그 때 묻지 않은 자연에 ‘공구리를 칠’ 생각을 했다니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발상이지 싶은데, 뭐든 축소시켜다가 손 닿는 곳에 끌어다 놓고자 하는 일본사람들의 성정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아무튼 그것도 광복 전의 일. 해방이 되자 일인들은 많은 적산가옥을 남기고 감포를 떠났다.

 건축물은 용도가 다해도 웬만해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물리 법칙에는 모순되나, 건축물의 경우 짓기 시작해 사람이 실제로 사용하기까지의 시간보다 사용이 다 한 후 완전히 형체를 잃을 때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기존에 있던 건축물을 대체할 필요가 생기거나, 풍화된 건물이 야기하는 사회적 비용이 철거 비용을 웃도는 경우에야 비로소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도시의 외관은 건축물 수요가 가장 많았던 전성기의 모습을 한동안 유지한다. 특히나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서 멀리 있는 곳일수록 더 그렇다.

 감포항도 마찬가지이다. 포구는 가장 번성했던 1960~70년대의 모습에서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 시절 감포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아니 아직 세월의 더께가 덜 덮였다고 해야 할까, 곳이 해국길이다. 해국길은 감포 읍내 주도로에서 한 블록 안쪽에 있는 골목길로, 근대 감포의 향수를 가장 잘 느끼게 하는 답사 코스이다. 해국(海菊)은 바다의 국화. 바닷가 짠바람을 견디고 피어난다는 점이 감포의 정서와 닮았다.

 세월에 풍화되고 사람의 손길에 변형되었지만, 그 긴 시간을 감안한다면 골목은 크게 변한 게 없어 보인다. 편백나무 널벽, 골함석 지붕, 유난히 낮은 2층 층고, 격자무늬 유리창 등. 골목의 이미지를 만드는 낯선 재료들이 기묘한 이질감과 환상성을 불러일으키는데, 밝고 아기자기한 벽화와 메시지들이 속 깊은 곳의 위화감을 중화시킨다. 묵은 감정을 객관화시킨다. 그리하여 아픈 역사적 배경은 기억의 영역으로 넘기고 이국적인 풍경만이 남게 한다.

 해국길을 거닐다 보면 어느쯤엔가 트렌디한 카페를 하나 보게 된다. 감포1925. 감포항 번화가의 ‘T’자형 교차로 중심에 있던 목욕탕을 대수선해 만든 카페다. 1925년에 들어선 건물이라고 하니 올해로 딱 백해째를 맞는다. 들어서는 순간 1900년대의 일상을 만나는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으니, 애들은 가고 어른들은 방문해 보시기를 권한다. 실내를 구경하며, 비치된 감포항 사진집을 보며 시그니처 음료를 두 잔이나 마셨는데 맛이 괜찮았다.

역사의 바다
 멀리까지 와서 감포항만 보고 가기가 아쉬운데, 그렇다고 토함산을 넘어서 경주 중심 권역까지 가기에는 부담스럽다면 인근의 다른 해안가 관광지들을 둘러보시기를.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고요하고 한적해 머무르기 좋은 척사항도 있고, 조금 더 멀리 가면 오류고아라해변, 전촌솔밭해변, 나정고운모래해변 등 이름도 풍광도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즐비하다.

 무엇보다 이 바다 역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운 곳이기에, 가볼 만한 명승지도 많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스스로 동해의 용이 되려 한 문무대왕의 수중릉, 그런 부왕의 은혜에 감복하여 신문왕이 완성한 감은사(지), 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지어진 이견대까지. 모두 이미 더 소개가 필요 없는 익숙한 명소들이다.

 그렇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감은사지 방문은 남달랐다. 경주를 떠나기 전 마지막에 들른 곳이었다. 대왕암해변이 근방의 모든 사람이 다 모여있는 것처럼 북적대고 여기저기 벌어진 굿판에 시끌벅적했던 것과 달리 감은사지는 적막했다. 초석으로만 남은 사찰의 흔적 앞에 서로를 의지하며 천년의 세월을 견딘 쌍탑 뒤로 오늘도 태양이 고요히 침잠한다. 잔디는 물색없이 푸르다. 그 위에 돗자리를 깔고 가부좌를 튼 여인이 보이고, 노랫말 없는 느린 멜로디가 어렴풋이 들렸다. 절터 한 켠에선 죽어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를 마른 고목이 오래된 가구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로 돌아와 유튜브에 존 바에즈를 검색해서 아무 노래나 틀었다.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겨울 바다’라는 말은 많이 쓰지만 ‘여름 바다’는 어쩐지 어색하다. 판단컨대 애초에 ‘바다’라는 단어가 겨울보다는 여름과 어울리기 때문에 구태여 수식을 추가하는 게 거추장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밖에는 온종일 비가 내린다. 이 장마가 끝나고 다시 뙤약볕이 내리쬐면 사람들은 다시 바다를 찾을 것이다. 드넓은 백사장, 색색의 파라솔, 수면에 반짝이는 햇살과 행복한 웃음. 해변은 상상만으로도 사람을 설레게 한다.

 그럼에도 문득 저 모든 것들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올 여름엔 포구를 기행해 보면 어떨지. 꼭 감포가 아니라도 좋다. 해변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사랑받지만, 포구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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