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비판의 자유, 그리고 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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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07.12. 조회수 639
칼럼






이근식 경실련 공동대표 (서울시립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전번에 이어 자유주의의 기본원리를 살펴 본다.



4. 사상과 비판의 자유



밀의 말과 같이 생각에서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생각의 자유는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자유이다. 자유 중에서 가장 먼저 쟁점이 되었던 것은 16세기 초의 종교개혁과 그로부터 촉발된 15세기 중엽과 16세기 전반의 종교전쟁에서 나타난 신앙과 양심의 자유였다. 오랜 종교전쟁을 통하여 인간의 신앙과 양심은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여 베스트팔렌조약(1648)에 의해 신구교도간에 종전이 합의되고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쉽게 사상의 자유로 확대되었다.



생각은 발표될 때에 비로소 사회적 의의를 가지므로, 생각의 자유는 생각을 표현하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포함한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토론(비판)의 자유를 포함하는데, 자유주의자들은 비판의 자유를 매우 중시하였다. 비판의 자유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잘못을 예방하고 시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식과 윤리에서 불완전하므로,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잘못을 바로 잡는 유일한 수단이 자유로운 비판이다. 권력자의 횡포를 제어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론, 주장 등)을 바로 잡는 것도 모두 비판의 자유로부터 비롯된다. 밀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가 예방되거나 시정될 수 있는 것은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 덕분이다. 밀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토론과 경험에 힘입어 자신의 과오를 고칠 수 있다.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하자면 토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잘못된 생각과 관행은 사실과 논쟁 앞에서 점차 그 힘을 잃게 된다."



특히 권력자에 대한 비판이 개인의 자유와 사회발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주로 권력자들이다. 극소수의 예외가 있지만, 권력자들도 모두 이기적인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공개적 비판이 없으면 모든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그러므로 사회의 번영과 발전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이냐의 여부이기보다, 권력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의 유무이다. 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권력자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한 국가는 융성하고, 민주주의국가라도 비판의 자유가 없으면, 몰락의 길을 걷는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 절대군주국가였던 조선의 경우에도, 상소라는 비판제도가 실제로 제 기능을 발휘하던 조선초기에는 일반적으로 군주의 전횡이 견제되어 정치, 경제와 문화가 모두 융성하였던 반면에, 미련한 왕이나 권문세도가들에 의하여 공개적 비판이 압살되었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조정이 부패하여 백성의 살림이 도탄에 빠져서 결국은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이 패망한 주 요인도 비판의 자유가 없어서 권력이 부패하였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비판의 자유가 없으면, 정치체제에 상관없이, 권력이 부패하여 사회가 쇠망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일 것이다.



비판은 과오의 시정과 예방이란 소극적 기능만이 아니라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적극적 기능도 수행한다. 개인, 집단, 사회, 학문 등 모든 것의 발전은 기존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즉 현실의 문제점의 발견과 지적으로부터 시작된다. 근대서양에서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공개토론회나 학술잡지와 같은 공개 토론의 장이 제도적으로 정착하였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대 자유주의 철학자 포퍼(Karl Popper)의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인식에서의 불완전성 때문에 인간은 항상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진리 그 자체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끊임없는 비판을 통해서 오류가능성을 조금씩 극복하여 진리에 점진적으로 접근하여 갈 수 있을 것이다.



5. 사회적 권력의 통제



강자만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므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자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이 때문에 사회적 강자의 횡포를 막는 사회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유주의 원리이다. 사회적 강자는 민주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국가권력이었으며 현대에는 여기에 재벌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추가되었다.



국가권력의 핵심은 총칼로 대표되는 물리적 폭력을 독점한다는 것이다. 밀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이전에는 국가권력자인 왕과 그 부하가 개인의 자유의 주된 적이었다. 물리적 폭력을 독점한 이들의 횡포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이에 저항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인민과 합동하여 시민혁명을 일으켜 군주의 절대권력을 철폐하고 국가권력을 인민(people)의 손으로 넘겨주어 국가권력자들의 횡포를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민주주의를 건설하였다.



국가권력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 민주주의이므로 국가권력자의 횡포가 존재하는 국가는 진정한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현재 세계 모든 국가들이 민주국가를 자처하지만 많은 나라에서 아직도 공공연하거나 은밀하게 국가권력의 횡포가 자행되고 있다. 북한, 리비아, 러시아, 중국 등과 같은 비민주국가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나 미국과 같은 소위 민주국가에서도 자유와 인권의 억압이 보이지 않게 자행되고 있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아직도 미완성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민주주의가 발달함에 따라서 국가권력의 횡포는 점자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반면에 현대사회에서 자유의 적인 새로운 사회권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재벌(대기업집단)이다. 문자 그대로 돈이 으뜸인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에서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재벌의 힘은 막강하다. 현대 세계에서 정부, 법조계, 학계, 언론계, 문화계 등 사회의 모든 부문은 이미 재벌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재벌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국가정책, 사법부의 판결, 언론과 학계를 통해 조성되는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하여 힘없는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과 평화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면 망하므로 재벌들은 이윤창출을 위해서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고 이들에게 인권, 안전과 평화, 자연보호, 인류의 미래 등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특히 재벌들은 언론과 학계를 동원하여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하여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원자력발전 지속의 불가피성을 대다수 인민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소위 원자력 전문가란 사람들은 언론에 나와서 '성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한 원전을 포기할 수 없다'고 인민들을 위협한다. 이들은 진실로 그렇게 믿을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믿는 것이 사람이다.



인류는 세계의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과 물자를 생산할 능력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 인류가 과잉생산의 단계에 진입한 지 수 십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계인구의 7분의 1이 가난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이들의 빈곤을 해소할 수 있는 자원들이 대량살상무기의 생산, 전쟁, 개발이란 미명의 자연파괴, 소수를 위한 호화사치재들의 생산에 낭비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자원 낭비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재벌들이 이윤창출을 위해 이런 산업을 계속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10년 사이에 세계적 금융위기가 반복되고 일본의 끔찍한 원자력발전 사고를 통해 원전이 인류의 재앙임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원전산업이 중단되지 않고 있는 배후에는, 우리나라에서 4대강 죽이기 사업이 강행되고 있는 배후에도 모두 재벌들의 이해관계가 숨어 있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침해하는 주된 적인 국가권력과 재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이 시대 자유주의의 첫째 과제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민주화로 인하여 권력의 축이 청와대에서 재벌로 이미 이동한 것 같다. 이미 재벌이 우리 사회의 제1권력이 된 것 같다. 과거 오랜 군사독재시절에 청와대에 꼼짝 못하던 재벌들이 이제는 공개적으로 정부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행정부, 의회, 법조계, 언론계, 학계 등은 재벌들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 있다. 날로 증대하여 가고 있는 재벌들의 힘을 어떻게 통제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할 것인가가 현재와 미래에 우리와 세계의 자유주의의 최대 과제일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에 국회의원, 장차관, 법조인, 언론인, 교수 등 소위 사회지도층인사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이들의 대부분은 '국물효과'(trickle-down effect)를 바라고 자발적으로 재계에 협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이들이 아니라 다수의 이름 없는 인민대중과 이들의 힘이 반영될 수 있는 민주주의에 있다. 인민들은 재벌들의 비대화로 인하여 생활이 어려워지고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재벌들에 협조하여도 국물효과를 기대할 수 없고, 일인일표의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통해 이들의 힘이 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벌을 비판하는 최근의 한나라당 의원들의 발언에서 이 가능성이 엿보인다.



6. 관용



사상과 비판의 자유는 관용(tolerance)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관용이 있어야만 자유로운 생각과 비판이 가능하다. 사람마다 종교나 가치관이 다르므로 자기와 다른 종교나 가치관을 인정하는 관용은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화합하지만 같지 않다)이란 공자의 말씀도 관용과 동일한 뜻일 것이다. 다원주의(pluralism)는 관용의 다른 표현이다.



사람들의 취향, 생각과 재주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모두에게 바람직하다. 하이에크가 말한 바와 같이 위대한 사회에서는 개인들의 목표가 서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상이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서로 이익을 얻으면서 함께 살아 갈 수 있다. 롤즈(John Rawls)도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관용을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핵심으로 삼았다.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서로 핍박하지 않는 한, 다양한 생각들을 모두 인정하여 병존토록 하자는 주장이다. 롤즈에 따르면, 정치적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사회의 기본 원리의 하나이며, 민주주의사회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는 모든 구성원에게 요구되어야 한다. 그에 의하면 관용의 정신은 종교개혁 이후 16-17세기에 유럽에서 신교와 구교간에 발생하였던 종교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체득된 종교적 관용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 칼 마르크스가 영국 런던에 망명해 살면서 독일의 노동자들에게 편지와 책으로 사회주의사상을 선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독일 경찰은 마르크스의 선동행동을 금지하기 위하여 영국 경찰에게 마르크스를 체포하여 넘겨달라고 공식으로 요청하였다.그러나 이에 대하여 영국 경찰은 마르크스가 범법행위를 하지 않았으므로 체포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당시 영국법으로는 출판이나 강연은 범법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50년 전의 영국보다 현재의 우리나라에서 관용과 사상의 자유가 부족한 것 같다.



열린 마음(open mind)이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비판과 관용이 가능하다. 열린 마음이란, 밀의 말처럼, 자신의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말, 특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말한다. 요즘 인터넷 댓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욕지거리로 비방하는 것은 증오만 낳고 자신의 인성도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밀이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의 판단이 참으로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지는 경우, 그것은 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그것은 항상 그가 허심탄회하게, 즉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의 의견이나 행위에 대한 비판을 자유롭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기본원리 끝)



※ 이 글은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2011년 7월 1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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