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기-행] 바다와 박물관, 신안에서의 느린 하루

회원미디어팀
발행일 2024-09-25 조회수 19883
스토리

[월간경실련 9,10월호][윤서기-행]

바다와 박물관, 신안에서의 느린 하루

최윤석 회원

 기상관측사에 기록될 유례없는 여름을 겪는 와중에 신안으로의 여행을 계획했다. 그때만 해도, 폭염특보를 접하며 송편을 먹고 있는 지금도 그렇지만, 도무지 한 치 앞의 기후 상황도 예상할 수 없었는데, 개중에 그래도 신안이 계절과 날씨에 따른 기복이 덜한 곳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신안에는 박물관이 많다. 그리고 곳곳에 더 지어지고 있다. 이른바 ‘1도(島) 1뮤지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19년부터 신안은 모든 유인도에 한 개 이상의 박물관 또는 미술관을 세우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실현해 나가고 있다. 프로젝트에 포함된 뮤지움은 24개인데, 이중 14개가 이미 완공되었고 10개는 건립 중이다.

 그렇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연과 예술, 그리고 사람의 흔적이 어우러진 공간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느리게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신안은 그런 곳이다. 박물관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물론 거짓말이다. 숨을 천천히 고르고, 삶의 온도를 잠시 식히는 시간, 그 속에서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신안의 하루를 담았다.

바다의 기억을 담은 보물들
 처음 간 곳은 자은도 9시 방향 양산 해변가에 위치한 1004뮤지엄파크. 다양한 전시관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신안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하고 있는 일종의 복합 문화공간이다. 기본 입장료는 성인 기준 만원인데, 입장권 하나로 단지에 있는 모든 전시관에 입장할 권리를 갖게 된다. 무엇보다 이런저런 할인이 많아 제값 주고 들어가는 사람은 몇 없어 보였다. 필자 역시 주소지인 경기도 여주가 신안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덕에 지불한 만원을 고스란히 지역상품권으로 교환 받았다.

 이곳에는 현재 세 개의 전시관이 운영되고 있는데, 저마다 다른 색깔로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역사적 요소를 담아내고 있다.

 우선 세계조개박물관은 오랜 세월을 거쳐 분화되어 온 조개 표본과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어, 바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기증자가 원양어선 선장 생활을 하며 40여 년간 전 세계 바다에서 수집한 산물이라고. 조개껍데기 하나하나가 독특한 모양과 색을 가지고 있어, 자연의 정교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젓가락 사이에 잡힌 때부터 입안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빼고 조개를 이렇게 자세히 볼 때가 언제 있겠는가. 새삼 전시라는 형태의 컨텐츠 습득 방법의 이점을 깨달으며.

 조개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마치 바다의 음악을 들려주는 듯하다. 이곳에서 만나는 조개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와 역사를 품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조개라는 테마로 역사, 예술, 문화, 요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종횡으로 누비며 색다른 시선에서 그 모두를 들여다보게 한다.

 조개박물관 맞은편에는 자생식물뮤지엄이 있다. 신안 을 구성하는 여러 섬에 분포해 자생하고 있는 식물들을 접할 수 있다. 신안의 수많은 섬이 여전히 야생의 생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바로 이 자생식물뮤지엄이 그 섬에 가야 할 이유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실물을 볼 수는 없지만 영상과 아트를 통해 생명의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관람객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곳의 전시는 식물과 인간의 공존을 새삼 체감하게 만들며, 자연의 진화와 인간의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디지털 아트와 실제 식물의 조화는 관람객에게 특별한 체험을 선사하며,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관람객들은 단순한 시청을 넘어,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수석미술관과 수석정원은 또 다른 예술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곳에는 전국 각지의 수석 애호가들이 기증한 1,004점의 수석(1004에 대한 신안군의 무서운 집착...)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 전시된 돌들은 시간이 빚어낸 조각 작품처럼 정교하고도 기묘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모름지기 현대문명은 인간이 보다 용이하게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자연물을 점점 작은 단위로 부수고 조합하는 형태로 발달해 왔다. 그렇게 본다면 수석을 수집하는 행위와 같이 자연물을 자연물 그대로 활용하는 일은 어쩌면 가장 비문명적인 행위일지도 모르지만, 수석이 품은 시간은 오히려 문명과 비문명의 척도를 아득히 내려다보는 차원의 스케일에 가깝다. 이곳을 거닐다 보면, 바람과 돌들이 전하는 무게감 있는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게 된다.

 자연이 만들어 낸 예술이 관람객에게 어떻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이다. 수석정원에서는 각각의 돌들이 그 자체로 이야기를 품고 있어,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감동을 준다. 돌의 조각들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 내는 풍경은, 방문객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한다.

무한의 바다를 품은 소박한 둔장마을
 양산 해변의 세 전시관을 둘러보고는 같은 섬의 또 다른 명소인 둔장 해변에 갔다. 여기 ‘무한의 다리’가 있다. 무한의 다리는 둔장 해변 앞에 높인 보행교로, 인접한 구리도, 고도, 할미도 등 세 개의 작은 섬을 잇는다. 총 길이는 1,004m(또...)이다.

 이 다리는 해수면에 거의 인접하게 낮고, 또 사색할 수 있을 정도로 길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두 특성을 가진 구조물은 흔치 않다. 신안 특유의 갯벌환경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한쪽에는 바다가, 한쪽에는 하늘이. 대책 없이 덥디더운 기온이 주는 막막함이 더해지면 대자연 속 먼지 같은 자아를 실감하게 된다.

 그 끝에 작은 섬 할미도가 있다. 서해안 다도해 권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그러나 동력장치의 도움없이 온전히 내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특별한 섬이다. 어쩐지 만만하면서도 애정이 생긴다. 고요한 풍경 속에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 숨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 섬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매번 그곳을 채우고 있는 잔잔한 음악들 때문이다. 섬에 도착하면 암초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앙상한 나무 아래 통나무로 지은 작은 매점이 하나. 그 위에 달린 나팔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작지만 섬의 분위기를 완전히 변화시킨다. 이 예쁜 건물과 음악 곁에서, 방문자의 순간들은 데이터가 아니라 필름으로 기록된다.

 한편, 해변 뒤 둔장마을에 작은 미술관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이 미술관은 둔장마을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둔장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곳으로, 지역 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미술관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을 풍기며 관람객에게 새로운 감상을 선사한다. 방문했을 때는 신안을 주제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개최한 사생대회 수상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작품들은 풋풋한 학생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신안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그들의 창의성과 순수한 감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곳의 예술 작품들은 바다의 웅장함과 대조를 이루며, 작은 공간 속에서도 깨알 같은 감동을 전해준다.

바다를 준동시킨 땅의 항쟁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암태창고미술관이었다. 이곳은 미곡창고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전시시설로, 1923년 암 태도에서 발생한 소작인 항쟁의 전개와 과정, 그 속에서의 아픔과 저항의 흔적을 다양한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작인 항쟁은 당시 농민들이 일제 식민지 하에서 소작료 인상과 불합리한 노동 조건에 반발하여 일어난 저항운동으로, 신안 지역에서의 농민운동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농민들은 기근과 가혹한 세금, 그리고 소작료 상승에 시달리며 극심한 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지어도 수익의 대부분을 지주에게 빼앗기며,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23년 6월, 암태도의 소작농들은 이러한 억압에 맞서 결집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소작료 인하와 임대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집단적으로 행동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항쟁은 단순한 소작농들의 요구에 그치지 않고, 일제의 억압적인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하였다.

 전시물들은 당시의 고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고통과 희망을 강렬하게 전달하며, 관람객들은 소작농들의 힘든 노동과 그들의 꿈을 담은 작품들을 통해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서, 관객에게 역사적 교훈과 감동을 전달한다. 특히, 소작인들의 저항과 투쟁의 의지를 그대로 담아낸 작품들은 당시의 역사를 모르는 이들조차도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암태도에 서있는 소작인 항쟁 기념탑은 그들의 역사를 기리며 우뚝 서있다. 이 기념탑은 1923년의 항쟁을 잊지 않기 위한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정의와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기념탑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과거의 기억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신안. 발음하면 많은 사람들이 흉흉한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세간에 오직 그런 잔상들만 도드라지게 기억되는 이유는, 그것을 대체할 다른 이미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삼팔선 이남에 남은 최후의 오지가 아니던가.

 그러나 한 번만 눈 씻고 보면, 해외에 가지 않고도 섬마다 기상천외한 풍경을 접할 수 있다. 울릉도에 처음 갔을 때 느꼈던 기분을 신안에서는 섬에서마다 느꼈다. 그런 와중에 군도, 주민도 모두 열심이다. 그런 마음이다. 이렇게 좋은 곳을 나만 알면 좋겠거니, 싶으면서도 너무 안 알아주니 아쉬운. 

 가을이다. 눈앞의 대상보다는 동떨어진 무언가를 그리기에 적합한 계절. 무언가 새로운 환경에서 사색에 빠지고 싶다면 신안을 떠올려 보기를. 1,004개의 신안, 수석을 수집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를 골라보자. 혹시 아는가,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1,005번째 섬이 눈앞에 나타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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