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기-행] 이야기에 물든 다(茶), 강진

회원미디어팀
발행일 2024.05.30. 조회수 17070
스토리

[월간경실련 5,6월호][윤서기-행]

이야기에 물든 다(茶), 강진

최윤석 회원

 

 아파트 단지 안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언제 이렇게 피었나, 싶게 정원마다 색색의 꽃들이 만발했다. 하나 같이 강렬한 채도를 가진 단색의 꽃들이 한데 뭉쳐 세를 과시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사거리마다 진을 치고 있던 색색의 사람들이 떠오른다. 4년마다 돌아오는 땅따먹기가 일으킨 흙먼지가 채 가라앉지 않은 어느 날, 그 풍진 세상과 가장 멀리 있음직한 곳을 찾아 강진으로 떠났다.

 강진은 한반도 최남단부에 위치한다.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형태이다. 북으로는 영암군과 면하고, 동서로 각각 장흥과 해남에 가로막혀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동서 중간을 ‘푹’ 파고들어 내륙 깊숙이까지 남해의 파랑을 전달해주는 강진만의 존재이다. 행정체계의 효율성만을 따지고 보면 강진의 존재는 어쩐지 어색하다. 그리 넓지도 않은 땅, 지도를 보면 차라리 강진만을 경계로 동서 각 권역이 장흥, 해남으로 합쳐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역사 이래 줄곧 독립적인 행정단위로 존속해 온 모종의 이유가 있었을 터, 다만 그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강진이 문자 그대로 바다를 ‘품고’ 있는 도시라는 것. 일종의 ‘패시브 스킬’처럼, 눅진한 바닷바람이 기천년간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정서를 구성하였을 것이다. 이어질 내용은 대개 산천에서의 시간에 대해서이다. 먼지 하나 없이 내처 푸르렀다. 그러나 그 산뜻해 보이는 대기 곳곳에도 섞여 있었겠지, 어떤 비애가. 아마 그건 바다의 일이었을 것이다.

다산초당ㆍ백련사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강진으로 유배된 뒤 10여 년을 지낸 곳이다. 가문이 풍비박산 났음은 물론이고 살아생전 자신의 귀향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는 생의 의지를 잃지 않고 이곳에서 수많은 통찰을 저서에 담아내 인류의 유산으로 남겼다. ‘초당(草堂)’이라는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본래 작은 초가(草家) 형태였으나, 그 원형이 무너진 자리에 1950년대 들어 지금의 건물을 다시 지었다. 비록 건물의 모습은 다르지만, 툇마루에서 바라다보이는 풍경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곳에 가면 200여 년 전 다산이 걸었던 길을 걸어볼 수 있다. 인가가 밀집한 마을에서 다산초당이 있는 곳까지는 제법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했는데, 숲길에 들어서자 남국의 수종으로 보이는 웃자란 나무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몸통을 점령한 푸른 이끼들은 습한 숨을 내쉬고, 넓은 나뭇잎 새를 겨우 통과한 빛줄기가 꽃가루에 산란하며 공간을 비추었다. 원시림 분위기가 물씬 났다. 무언가를 잊기에도, 반대로 무언가를 생각하기에도 좋은 길이었다.

 여유가 있다면 다산초당부터 인근의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백련결사(白蓮結社)’의 그 백련사가 맞다. 다산은 당시 백련사의 주지였던 혜장 선사(1772~1811)와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초당에서 사찰까지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절반 정도는 오르막길이고 나머지 절반은 내리막이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그 경계를 기점으로 숲의 대기와 식생이 갑자기 바뀐다는 것이다. 우연이겠지만 종교와 학문의 차이를 넘어 서로를 지음(知音)으로 맞이한 둘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 보여 흥미로웠다.

 경로는 어렵지 않다. 오솔길을 한참 걷다가 느닷없이 시야가 탁 트이고 기름진 찻잎 너머로 해수면에 비치는 윤슬이 보이면 거기서부터가 백련사다.

영랑 생가
 낮에는 영랑(永郞) 김윤식(1903-1950) 시인의 생가에 갔다. 그의 출생지가 강진임을 이번에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서정시인들의 성지라는 것도. 이것도 바다의 일이려나? 생가는 강진군청 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존돼 있다. 겉보기에는 민속촌 풍의 드라마 세트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직접 거닐며 시비(詩碑) 하나하나를 읽다 보면 그가 시에 녹여 내었을 물상(物像)들을 고려해 공간이 세심히 구성되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뭘 모르는 와중에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로 시작하는 그 시가 참 예뻤다. 그러나 교과서에서 본 대부분의 시가 그렇듯이 학창 시절을 거치며 점차 평범하게 윤색되었다. 때때로 어떤 것들은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이렇게 발품 팔아가며 적극적으로 내 시간 안으로 끌어들인 시구들은 익숙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영랑은 이곳 강진에서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창간을 주도하고 순수문학의 씨를 뿌렸는데, 생가 맞은편 시문학파기념관에서 그 유산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시문학파의 일원인 시인 김현구(1904-1950)의 생가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까닭에 따로 소박하게 ‘현구길’이 조성되어 그의 생애와 시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중 마음을 크게 동하게 한 시를 보아 따로 소개한다. 

풀 캐는 색시
김현구


벗은 발로 호미 들고 오늘도 들에 나와 
풀 캐는 시악시의 머리에 쓴 하─얀 수건
바람에 나풀리며 제 혼자 흥거리니 
쓰린 세상 눈물이랴 임 그리는 설움이랴 
풀 캐며 흥거리다 머언 길 보고 한숨 쉬니
작별한 그대 임이 이 봄 따라 오마든가 
길에 선 나그네의 걷는 걸음 더디뵈니
아마도 늬 그리는 임은 이 봄에도 안 오신가

백운동ㆍ강진다원
 사의재, 강진만생태공원, 전라병영성 등을 느긋하게 답사하고 마지막으로 백운동(白雲洞)으로 향했다. 백운동은 조선 중기부터 호남의 선비들이 별서정원(別墅庭園), 요샛말로 별장을 마련해놓고 자연 속에 은일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렸다.

 목적지로 지정하고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복종하며 길을 따라갔다. 그러다 주차장에 거의 다 갔을 때쯤, 왼편으로 느닷없이 초록잎의 바다가 펼쳐졌다. 어느새 월출산의 품 안이었다. 강진 최고의 비경이 거기에 있었다.

 억세디억센 월출산 멧부리의 기암괴석들 아래로 한없이 여린 잎사귀들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제 성질껏 멋대로 하늘을 향해 반항심을 드러내는 산의 야생성이, 극도로 정제된 차밭의 순종적인 모습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높낮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기다란 산등성이가 마치 세계를 분리하는 벽이라도 된 듯이, 문득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이국에 덩그러니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세계 안에 계속 속해 있고 싶었다. 백운동 별서정원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장 근처 찻집으로 들어갔다(공교롭게도 상호가 ‘백운차실’). 산과 차밭이 잘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등지고 있는 찻집 건물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골짜기로부터 불어온 선선한 바람이 이마를 가볍게 훔쳤다.

 순간 지극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신경계의 모든 아우성이 일순 침묵하며 미소를 띠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자연과의 합일’이랄까, ‘물아일체’라고까지 하긴 뭐하지만, 그래, 흰(白) 구름(雲)이라고 하자. 구름처럼, 대기에 속한 듯 속하지 않은 듯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차를 우리고, 순서에 따라 옮겨 따르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동 역시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이러니 은거를 마음먹은 양반이라면 이곳을 찾지 않을 재간이 없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이렇기라도 하니 현실에서 내팽개쳐진 이라도 견딜 수 있었겠구나, 싶기도. 돌아온 세상에서 풍진이 기승을 부릴 때마다, 나는 아마 다시 이 낙토를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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