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레이거노믹스

관리자
발행일 2008.06.10. 조회수 463
칼럼


이근식 경실련 공동대표·서울시립대 경제학부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을 바꾸라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독선과 오만을 버려라, 인재를 고루 널리 써라, 조급함을 버려라, 대범하라, 국민에게 져라,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라 등 모두 올바른 지적이다. 여기에 복지억제 정책을 성장과 복지의 병진 정책으로 바꾸라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부자들이 고용과 소비를 늘리는 덕분에 서민도 잘 살게 된다는 것을 경제학에서 ‘국물효과(trickle-down effect)’라고 부른다. 이는 재분배 정책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부의 집중을 옹호하기 위해 주로 쓰였다. 후진국에서 선성장·후분배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장촉진이란 명분으로 세금을 줄이고 복지지출을 축소하였던 1980년대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레이거노믹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 효과를 강조했다.


국물효과의 원조도 애덤 스미스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을 책에서 딱 두 번 사용했는데, 한 번은 『국부론』에서 개인이 자기 이익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부를 증대시키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의 덕분이라 했고, 또 한 번은 『도덕감정론』에서 부자들이 노동자나 하인을 고용하고 사치재를 구입하는 덕분에 가난한 사람도 모두 생활물자를 충분히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의 덕분이라고 했다. 후자가 정확히 국물효과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의 손이고 구체적으로는 시장의 힘이었다. 국물효과란 시장경제의 발달로 빈곤이 해소됨을 말한다. 지난 200년의 자본주의 발달 덕분에 대부분 선진국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나 풍요를 누리게 되었으나, 비중은 적지만 많은 사람이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공공복지 제도다.


현 정부는 기본적으로 다시 과거의 성장 제일주의로 회귀하고 복지지출을 억제하려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첫 번째로 내세운 747 공약(7% 성장, 4만 달러 소득, 세계 7대 경제 강국)이 성장 제일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공약에는 양적인 경제성장만 있지, 고용과 분배에 대한 고려가 없다.


감세, 규제 완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기술개발 지원 등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덕분에 대기업의 투자가 늘더라도 고용효과는 의심스럽다. 대기업의 신규투자가 고용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노동절약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업원 500명 이상인 우리나라 대기업의 고용인 수를 보면 93년의 211만 명에서 2005년의 132만 명으로 반 가까이로 줄었다. 그리고 1인당 소득이 현재의 2만 달러에서 4만 달러로 늘더라도 현재와 같이 양극화가 계속된다면 대다수 국민의 실제 생활수준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4월 말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09년도 예산안 편성지침’을 보면 지난 10년간 복지지출 증가가 과도해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정부예산을 성장에 집중하기 위해 복지지출 증가를 억제할 것을 분명히 했다. 또한 정부는 빈곤층을 위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의 대상자 수와 지원수준을 현 수준으로 동결하겠다고 발표했다.


평균소득 2만 달러의 중진국인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지출 비율은 2007년 7.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21%의 약 3분의 1에 불과하며, 선진국들이 소득 1만 달러일 때의 평균인 18%의 반도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정부의 생활지원을 받지 못하는 절대빈민이 200만 명에 가깝다.


이 대통령 말대로 일자리 창출이 최선의 복지지만, 아무리 발전해도 시장이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도 아니며, 모든 일자리가 충분한 소득을 주는 것도 아니다. 공공복지는 반드시 필요하며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현재 우리나라의 공공복지 제도는 한참 후진국 수준이다. 가난 속에 방치된 어린이·노인·장애인·실업자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국물효과를 신뢰하고, 성장촉진이란 명분으로 부자의 세금을 줄이면서 서민을 위한 공공복지를 억제하려는 MB 노믹스는 한국판 레이거노믹스다. 일자리 창출은 시장에 맡기고, 공공복지는 정부가 맡아야 한다. 제이 에스 밀의 말처럼, 죄를 지은 죄수에게도 의식주를 제공하면서 죄도 안 지은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잘못이다. 국물효과를 과신하는 레이거노믹스는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이다. 성장과 복지는 같이 가야 한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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