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상근활동가들께 드리는 편지

관리자
발행일 2009.11.18. 조회수 404
칼럼

 


전국의 상근활동가들께 드리는 편지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함께 부를 동지입니까?
                                 



김종익(경실련협동사무총장, 목포경실련 사무국장)


 


 


  한 해를 돌아보는 이즈음에 경실련운동을 돌아보면서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스물아홉 살 젊은이가 1992년 9월에 종로 5가에 자리 잡은 경실련사무실을 처음 찾은 것이 꼬박 17년 전 일이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그러시겠지만 경실련을 빼놓고는 청춘을 얘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경실련 환경개발센터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한때는 ‘환경오빠’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본디 생태주의자가 되지 못한 탓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조직국, 지방자치위원회, 도시개혁센터를 전전하며 일하다가 목포에 내려왔습니다. 목포에 내려와 산지도 만 10년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저는 정책과 씨름하고, 조직문제에 몰두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경실련이 가장 잘 나가던 시절에 시민운동에 동참한 저로서는 참으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실련 덕분에 저는 시대를 고민하는 많은 지식인들을 만났고, 제 좁은 소견과 어린 나이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보게 된 셈입니다. 종로 5가 경실련 사무실은 보잘것없었고, 담배연기에 찌들어있는 우중충한 공간이었지만 5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는 연일 많은 정치인들과 관료들, 취재거리를 찾는 기자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또 세상살이 고민을 잔뜩 담은 보따리를 들고 오는 시민들도 당시 우리의 주된 고객이었습니다.
  90년대 초중반에 경실련은 많은 지식인들과 시민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시민운동, 민주주의, 공공선, 정의 등 지금 익숙한 용어들은 시민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민들은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경실련은 이 말들이 거침없이 세상을 활보하게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6․10 민주화항쟁의 대표적인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경실련은 민주화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 그 빚을 톡톡히 갚은 셈입니다.


 


  그런데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세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면서부터 오히려 경실련은 예전만큼 세상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고 했나요? 우리가 비판했던 관료주의의 폐쇄성과 경직성이 우리 내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보는 안에서 소통되지 못했고, 서로를 감싸야 할 동지적 관계로 맺어져야 할 상근활동가들이 서로를 소외시키는 경우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조직 전체가 심사숙고해야 할 굵직굵직한 일들이 충분히 공유되지 못한 가운데 발표되는 경우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경실련을 태동시킨 지식인, 일반 시민, 운동가 등 세 주축으로 형성된 견고한 삼각 동맹조차도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경실련의 사회적 영향력이 하늘을 찌른다는 언론의 대서특필에 취해서 변화된 정부에 맞는 변화된 전략을 갖지 못한 사이에 우리 못지않은 지식과 신념체계를 갖춘 이들이 만든 여러 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바라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만 우리가 그토록 고수하고자 했던 비정파성에 대해서 의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뼈아픈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조직 내부가 점차 크게 요동을 치면서 신뢰는 금이 갔고, 지도력은 흔들렸습니다. 평생 경실련운동을 할 것 같았던 상근운동가들이 썰물 빠져나가듯이 우리 조직을 등지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습니다. 지내놓고 보면 충분히 이유를 알 수 있고, 해법도 있었는데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아마도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 주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과거를 돌아볼 줄 알게 되니까요.


 


  제가 겪은 경실련 7년은 이랬습니다. 아픔도 많았지만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환경개발센터에서 일하면서 지구환경과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화두를 접했고, 역마살이 끼었다 싶을 정도로 지역조직을 다니면서 현장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지방자치위원회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지방자치정책을 쏟아내면서 정책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훈련을 하게 되었고, 도시개혁센터를 통해서는 미래의 도시와 시민들의 삶의 질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지면을 빌어 특히 중앙경실련에서 만난 세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조창현 지방자치위원장님은 제가 만난 지식인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분으로 기억됩니다. 연고도 없는 타교생인 제가 유례없이 ‘공로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시면서 까지 공부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셨습니다. 권태준 환경개발센터 대표님은 한마디 한마디가 도시정책 교과서라고 할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셨고, 술자리에서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농담까지 하실 정도로 허물이 없었습니다. 유재현 사무총장님은 시민운동 초보자로 하여금 합리성과 논리구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어준 분입니다. 서울 생활 7년에서 잊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변화를 꾀하고 싶어 하는 것이 운동가의 생리인가 봅니다. 경실련 7년차에 접어들면서 밤과 씨름하며 매달려온 정책들이 실체를 드러내는 곳이고, 시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지역에서 시민들과 함께 일하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집안에 우연하게 일이 생기면서 목포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목포는 저를 낳아준 고향입니다만 고교시절까지 보냈을 뿐 사회적인 연고는 전혀 없는 곳입니다. 


  낯선 이방인으로서 대학 연구실과 상점 문을 두드리며 목포에서 경실련운동을 함께 하자며 무턱대고 졸라대던 때가 1999년 겨울이었으니 벌써 10년이 되었네요. 그러나 지역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저에게 두터운 벽이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불쑥 내려와 경실련운동을 한다고 돌아다녔으니 그럴 만 했을 겁니다. 특정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졸업기수는 어떻게 되는지를 묻는 질문은 항상 저와 함께 했습니다. 어떤 분은 초등학교 연고까지 끄집어내면서 ”자네 같이 외지 사람이 목포에 내려와서 운동이다 뭐다 하다가 무책임하게 일만 벌려놓고 떠나가서 물만 흐린 경우가 많았네.“라며 은근히 모욕을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정적인 유대감의 표시인 ‘형님동생문화’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지역의 배타적 정서는 이방인을 쉽게 포용하지 않았습니다.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사안별로 많은 연대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설적인 연대구조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목포에서 시민운동을 하고 계시는 경실련 회원들은 창립 이후 여전히 재력가, 명망가, 특정한 조직을 끌어들이는 일을 삼가하고 있습니다. 사유화가 두렵고, 지도력이 재생산되지 못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지름길을 놔두고 한참을 돌아갔기 때문에 시작은 힘들었지만 결국 잘한 선택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공유했기 때문에 창립 이후 한결같이 조직의 균형추 역할을 해주시는 박종두 교수님을 비롯한 모든 임원과 회원들은 소중한 목포경실련의 자산으로 지금까지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와 시장을 상대로 서울이라는 큰 판에서 활동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책이 실질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내 이웃들의 살림살이를 가까이서 엿볼 수 있는 지역운동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서울에서 하는 운동이 잘 차려입고 점잖게 양식을 먹는 모습이라면 지역운동은 왁자지껄한 식당에서 수다 떨며 한식을 먹는 모습인 듯 합니다. 지역 운동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공간입니다. 내 고장의 현재, 미래와 씨름하며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려는 지역사회의 다양한 시도와 풀뿌리 시민운동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곳입니다. 반면에 양극화와 갖가지 차별의 희생자인 사회적 약자의 아우성, 구도심의 쇠퇴와 농촌의 피폐, 난개발로 몸살을 앓는 도시의 그림자, 끊이지 않는 토착비리, 심화되는 지역불균형과 일그러진 지방자치 등을 고스란히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지역이기도 합니다. 숱한 제안과 정책이 올바로 쓰이지 못할 때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야”라며 자조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지역은 늘 희비가 엇갈리는 공간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금과옥조처럼 강조하는 거버넌스 구조와 시민참여는 ‘공치’를 하기에는 역량이 못 미치는 지역 시민사회로서는 과중한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다원화되어 있는 시민사회에서 권위와 실력을 인정받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이익과 조직의 지향이 충돌할 경우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지역운동은 역동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시민운동가의 지식과 감성을 무디게 만드는 구석도 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연일 현안에 매달리고, 동네 사람들과 알콩달콩 지내다보면 나도 모르게 국가에 대해서는 ‘모르쇠’, 지역에서는 ‘마당쇠’가 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네에서도 국가를 품고, 세계를 품어야 한다고 늘 경계하지만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보다 더 부단히 성찰하고 경계해야 하는 곳이 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은 서울과 달리 사람들과 맞닥뜨리면서 활동을 하는 곳입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갈등을 겪기도 하는 일이 일상으로 반복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서울에서 알지 못했던 세상살이를 배웠습니다. 


 


  지역운동 10년을 하면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일을 한 가지만 들어보라고 하면 제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구성원들은 누구나 사회적 약자와 함께 만든 장애인 인권조례를 꼽을 것입니다. 목포경실련이 조례의 주민청구제도를 활용하여 제정한 전국 최초의 장애인편의시설사전점검조례는 그 뒤 여러 자치단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전라남도장애인차별금지및인권보장에관한조례는 조례안이 만들어지고 있고, 빠르면 올해 제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빈곤문제와 씨름한 것도, 외상으로 산 배 한척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민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듣기위해 선상토론을 벌인 것도 잊혀지지 않는 일들입니다. 


  목포경실련에는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장애가 있는 회원들이 적지 않습니다. “내 소원이 자식 놈한테 “아빠!”라는 소리를 듣는 거요.“라고 눈물을 보일 때, “나도 아이를 갖고 싶지만 부부가 다 중증시각장애인인데 욕심껏 아이를 가지면 잘하면 자식들은 괜찮을 줄 모르지만 3세에는 다시 고통스러운 일이 생겨날 거요.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라며 한숨을 쉴 때,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지만도 못한 사람들입니다.”며 자조적인 푸념을 쏟아내는 청각언어장애인들의 아픔은 지역에서 그분들과 대하며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장애인의 일상과 인권을 일러준 회원들은 저와 제가 속한 목포경실련으로 하여금 사회적 약자로부터 비껴나지 못하게 묶어주는 강한 유대의 끈이 되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이런 맛에 지역에서 버텨나갑니다.


 


  저는 관습적인 시민운동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시민운동이 살 길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삽니다. 시민단체는 시민사회의 대변자도 아니고, 자처할 이유도 없으며 단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간곡히 전달할 뿐이라고 생각하면 ‘역사적 소명의식’이라는 무게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민단체간의 연대라는 답답한 틀을 벗어나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활짝 열어 연대하고 협력하는 유연한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축구를 보다보면 공간을 연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실제로 조그만 축구경기장에서 없는 공간을 만들어가며 공을 차는 선수들을 보면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밖에서 볼 때 시민사회라는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우리 모습은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을까요? 목포에서 시민운동을 하면서 회원들께 종종 “두렵다”는 말을 합니다. 지혜가 부족한 우리가 혹시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혹시 우리만의 세계기 만들어낸 편협한 주장은 아닐까요? 늘 반문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교회식 표현으로 믿음이 부족하지만 가끔은 염치없게 하나님께 무릎 꿇고 지혜를 달라고 때때로 조릅니다.   


 


  저는 요즘도 철없는 신참처럼 공동체를 꿈꿉니다. 미국의 작가 소로우처럼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하는 국가”를 상상합니다. 작지만 지역에서라도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하는” 그런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제 소망입니다. 그리고 조금 생뚱한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이왕 세상과 부딪쳤으니 통 크게 일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삽니다. 사마천이 억울하게 죄를 받아 죽게 생긴 임안이라는 장수를 위로하면서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처럼 큰 반면 어떤 사람의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 가볍다.”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 자신이 이미 궁형이라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이겨낸 터라 그의 위로가 주는 감동은 더합니다. 처음 학생운동을 시작하고, 노동운동을 시작하고, 시민운동을 시작하였을 때의 각오라면 능히 이겨내지 못할 게 있을까 싶습니다. 


 


  시민운동 17년을 했으면 전문직업인이 되었다고 할 만한데 여전히 우리는 ‘기타’직업군에 표시를 해야 하는 처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타 인생’이 될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쩔 때는 진짜 ‘기타’ 인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외줄 타기하다가 삐끗하면 실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 우리 운동가들이니까요. 


  시민운동가가 실족하지 않는 방법에는 그다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수도 없이 접하며 외줄을 타는 우리들에게 논어에 나오는 ‘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은 참으로 소중한 경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실련 운동방법론인 ‘실사구시’만큼 백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프로페셔널한 직업운동가답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힘을 주는 조직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오려는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줄」이라고 하고, 어미 닭이 화답하면서 밖에서 쪼아 주는 것을「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세상을 바꾸어가는 과정이 곧 줄탁동시가 아닐까요? 시민운동가들은 때로는 ‘줄’을 하는 병아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병아리를 돕는 ‘탁’을 하는 어미닭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의 온갖 껍데기, 예를 들면 빈곤, 폭력, 차별, 불의, 오만, 편견, 독재 등을 깨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우리 내부에 깊이 박혀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신감 결여라는 껍데기도 줄탁동시로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10여 년 전 우리가 겪었던 고통으로부터 얻은 교훈이기기도 하고, 내외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봉착해있는 시민운동이 돌파구를 찾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할 겁니다.


  경실련에서 보낸 17년 활동을 돌아보며 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선후배 상근활동가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함께 부를 동지입니까?
  “동지로 만났으니 동지로 살아가야지요.”
                                                                         - 끝 -



 


<약력>
1992년 9월 ~ 1999년 7월
 환경개발센터 부장, 조직국 부장, 지방자치국장, 도시개혁센터 사무국장
2000년 3월 ~ 현재까지
 목포경실련 사무국장
 경실련전남협의회 사무국장
2009년 1월 ~ 현재까지
 경실련협동사무총장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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