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상상력의 빈곤(2)-일주일만에 끝난 정지선 준수

관리자
발행일 2004.08.02. 조회수 754
칼럼









필자는 중증 개혁병 환자다. 개혁피로증에 개혁무용론이 판치며 개혁은 그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현실속에서 혼자만 소리높이 개혁을 외치고 있다. 필자에게만 한국경제의 신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탓일까? 과거의 개혁은 잘못된 개혁이며, 그 개혁이 성과도 없이 좌초한 것은 파괴적 개혁의 결과라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필자는 새로운 창조적 개혁을 주장한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하나라도(!)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개혁을 요구해온 이론적 근거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눠보려 한다.


홍종학 교수


(경원대 경제학과, 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  




 


 


  필자가 살던 아파트는 고가도로 밑에서 좌회전을 해서 들어가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전방의 터널에서 나온 차들이 고가를 타지 않으면 아파트 입구 쪽의 가파른 경사로를 타고 내려오게 되어있었다. 가파른 경사로에 신호등도 꽤 멀리 있는 탓에 이 차들은 정지선을 무시하기 일쑤여서, 차가 밀리는 퇴근 시간에는 신호가 바뀌기를 몇 번이나 기다리다가 경적을 울려대며 간신히 좁은 차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서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퇴근시마다 자주 이런 일을 겪으며 짜증이 났지만 길을 막아선 차의 운전자들만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끔 정지선을 지키는 지혜롭고(!) 선량한 운전자가 있어도 곧 옆 차선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탓에 결국은 마찬가지 상황이 되었다. 교통체증이 심한 퇴근시간에 조금 더 가봐야 서있긴 마찬가지인데도 그런 운전자가 대부분이었다. 더욱 짜증나게 하는 것은 파출소가 바로 10미터 밑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그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은 정지선 단속을 하겠다고 나섰다. 놀랍게도 그날 집에 가기 위해 좌회전을 기다리고 있던 필자의 차를 막아서는 차는 없었다. 퇴근 시간에 처음 뻥뚤린 대로를 가로질러 아파트에 들어가며 필자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워낙 복잡한 교통체계와 불합리한 도로구조 때문에 단속기준에 불만을 품은 운전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많은 실랑이가 있었다고 보도되었지만 필자는 이 정지선 준수가 꼭 정착되길 바랐다.




정지선 준수는 가능했다




  과도한 단속의 폐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도 있다. 도로구조 때문에 단속되는 억울한 운전자를 구제하고 고의적으로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운전자를 가르기 위해서는 경고장을 활용하면 된다. 정지선을 어기면 무조건 경고장을 발행하되, 3번 적발되면 비로소 과태료를 부과하고 경고장의 유효기간을 6개월 정도로 정하면 6개월에 3번 이상 정지선을 위반하는 운전자들만이 과태료를 부담한다. (회수나 기간은 적절히 조정할 수 있다.)


 


설사 도로구조나 교통체계가 잘못되어 어쩔 수 없이 정지선을 위반하는 경우라도 운전자의 부담감은 줄어들게 된다. 이런 정책 하에 어느 정도 운전자들이 정지선을 지키는 문화가 정착되면 그 후에는 많이 위반하는 장소를 중심으로 면밀하게 도로구조나 교통체계의 문제가 없는지 분석하여 개선해 나가면 된다. 최소한 석 달 열흘은 철저히 단속해야 정지선 준수는 새로운 교통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희망은 일주일 만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필자의 아파트 입구는 다시 경적소리가 진동하고 날씨가 더워지면서 짜증나는 얼굴들로 채워졌다. 도로에 경찰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정지선 단속은 없던 일이 되었다. 정지선 단속 첫날 요란했던 보도에 비하면 이해할 수 없도록 조용하게 왜 단속을 안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설명도 없이 예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마 어느 날 또 그들은 일제 단속에 나설지도 모르겠다. 그 때 필자가 단속에 걸린다면 필자는 분노할 것이다.




교통질서 하나 못 바꾸는데 어떻게 경제질서를...




  새로운 교통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행정력의 동원뿐 아니라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운전자와 보행자의 인식을 변화시키는데 방해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없다면 새로운 질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설사 지혜롭고 선량한 운전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계속적으로 손해를 본다면 그런 운전자의 숫자는 줄어들게 된다. 규칙을 어기는 운전자에 대한 적절한 단속이 없다면 그런 난폭한 운전자의 수는 증가한다. 정부의 지도를 순순히 따를 운전자의 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자의적인 행정력을 행사하는 횟수가 늘수록 줄어들게 된다. 결국 교통 혼란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경찰은 오로지 수익금을 높이기 위해서 교통단속을 강화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경제질서도 교통질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로운 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적 분석에 입각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개혁이 뭔지 모르는 개혁세력, 시장경제 못할 것 같다고 협박하는 관치의 달인들, 힘센 놈들은 내버려두라는 천민 자본주의자들.... 한국에서 제대로 된 시장경제 하기는 힘들 것 같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할 시점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이 글은 경실련의 공식적인 견해와는 무관한 필자 개인의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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