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진보와 보수, 그것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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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02.03. 조회수 37836
칼럼

[월간경실련 2023년 1,2월호-우리들이야기(1)]

진보와 보수, 그것을 넘어서!


박만규 아주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진보와 보수는 세상을 보는 창이다. 동일한 사건을 놓고 그 원인과 책임 소재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예컨대 이태원 참사에 대해 진보는 사고의 원인을 재난 안전 시스템의 미비함과 운영의 잘못에서 찾으며 이로 인해 국가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반면에 보수는 군중들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좁은 공간을 앞다투어 이동하다가 일어난 사고라 보고,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운집한 군중들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간주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사회 시스템에서 찾는 진보의 시각과, 개인의 노력과 인내심의 부족에서 찾는 보수의 시각과 일치한다. 바로 이 때문에 보수는 진보에 대해 자신이 잘못을 해 놓고 문제만 생기면 남 탓, 사회 탓을 한다고 비판한다. 반면에 진보는 사회적 안전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며, 만일 각자도생이 안전의 기본 수칙이라면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라며 비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처럼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을 진보로 만들고 어떤 사람들을 보수로 만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정치학적으로는, 기득권 계층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경향으로 인해 사회에는 문제가 없고 모든 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보는 보수가 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저소득층은 개인적 노력 여하보다 사회의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부(富)를 얻기가 어렵다고 보므로 진보가 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흔히 설명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기득권 계층이라도 진보를 선택하고 저소득층이라도 보수에 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보다는 다른 설명 방식을 찾아야 할 텐데, 조지 레이코프(G. Lakoff)의 인지언어학의 방식을 채택하여 말한다면, 내 생각에 진보와 보수의 사고의 차이는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즉 진보는 국가를 하나의 공동체로, 특히 구성원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가정(家庭)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한데 반해, 보수는 국가를 각자가 서로 좋은 결과를 얻으려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일종의 경기장 같은 곳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전자의 경우 가정에서 일이 잘못되면 부모가 책임을 지듯이 정부는 구성원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구성원들이 서로 공감하고 협력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도록 이끄는 역할을 맡아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 정부는 경기의 규칙이 올바르게 적용되어 각자가 자기 기량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심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처럼 대조적인 두 관점은, 곰곰 생각해 보면, 강조점의 차이만 있을 뿐 사회를 운영하는 데 모두 필요한 측면을 갖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는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개의 바퀴이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 이후 터져 나오는 발언들과 행동들을 보면 진보뿐 아니라 보수의 시각에서도 위태로운 것들이 많이 있어서 걱정스럽다.


우선, 이번 참사와 관련된 행정부의 각 기관장들이 자신의 책임을 즉각 인정하고 사과를 표명하는 대신, 사고의 원인을 수사를 통해 밝히는 데 힘을 집중하겠다고 한다든지, 누군가 고의적으로 밀었다는 증언이 있고 혹시 불순분자의 소행일 수 있으니 철저히 수사하여야 한다든지, 결국 책임은 법정에서 가려야 한다는 식의 발언들이 나왔는데, 이는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부의 행정 서비스는 매번 사법부에 그 옳고 그름을 물어보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수시로 행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판단은 분쟁이 생겨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때 최종적인 판단을 의뢰하는 것일 뿐으로서, 실제로 법적 책임 규명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한다. 사법은 미래 시제이고, 행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일각에서는 아이들이 길을 가다 난 사고에 대해 왜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는 주장을 한다. 만일 이것이 단지 길을 가다가 난 사고라면 이러한 주장은 옳다. 왜냐하면 이 경우 신호체계와 도로구조 설계 및 관리에 문제가 없었다면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수많은 사람들의 운집과 그에 따른 엄청난 위험 요인들의 증가가 충분히 예측되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에 대한 예비, 현장에서의 관리 등 많은 과제가 생긴다. 또 신고에 대한 대응, 즉 신속하게 출동하여 현장에서 취해야 할 조처들이 있는 것이다.


개인이 불가항력의 상황에 처한 경우에는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 1 제곱미터(m2)당 최소 8명, 최대 10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상황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임계점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안전', '안보'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보수의 본령이다. 다른 것은 다 내주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혹자는 자발적으로 놀러 가다 일어난 사고에 왜 정부 기관의 책임이 있는지를 따지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일을 하는 삶을 우대하는 자본주의 정신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일만 하는 깃이 아니라 놀기도 한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이고 유희적 본능을 가지고 있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인 것이다. 그래서 놀러 간 사람의 생명도 똑같이 소중하다.


심지어 나라 구하다 죽었느냐는 식의 비아냥과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을 쏟아내는 발언들이 SNS나 언론 기사에 많이 나왔다. 그런데 이런 게시물에 오히려 ‘막말이 아니라 맞는 말이네.’, ‘소신 발언에 속이 후련하다’라며 동조 내지 지지하는 댓글이 많이 붙어 있다는 점이 놀랍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이들은 유족의 대응이 너무 과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고 이 사건을 지나치게 오래 끌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이 진정한 사과 대신 책임이 없다는 식의 발언만 되풀이하고 있고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커녕 오히려 혐오 발언 같은 2차 가해를 쏟아내는 상황에서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위에서, 보수는 국가를 각자가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일종의 경기장 같은 곳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지만, 이를 넘어서, 세상을 약육강식의 전쟁터 같 은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듯이 사회의 섭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생물진화론의 적자생존처럼, 사회도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보아 이러한 사고방식을 사회적 다위니즘(Social Darwinis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의 요체인 ‘자연 선택’이 아니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왜곡된 명칭이기는 하지만 편의상 쓰인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 개발과 후진국 착취,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우리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와는 분명히 다르다. 호모 사피엔스는 UN과 같은 많은 기구와 다양한 환경을 만들고 국제 평화와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는 인간과 생명체에 대한 윤리의식도 갖고 있다. 특히 선진사회일수록 사회적 안전망을 다양하고 폭넓게 갖추고 있다.


자기 안전에 대한 기초적 책임은 개인에게 있지만 다중에 의한 사고의 위험성이 인지된 경우는 국가 기관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행정안전부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 안전이 정부기관의 영역임이 분명하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서 가자, 선진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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