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려보는 '시민이 주인되는 청계천'

관리자
발행일 2005.11.02. 조회수 2286
정치


 


 지난 10월1일 청계천 복원공사가 3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완공, 서울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수많은 찬사와 격려가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였고, 이명박 시장의 대권가도에 날개를 달았다는 정치적 분석까지 곁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점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시민단체 및 관련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애초 서울시는 서울의 생태와 역사문화를 복원하고 시민이 참여하는 새로운 도시행정 패러다임을 열겠다며 청계천복원의 당위성을 설파했지만, 복원이 완료된 지금 과연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있는가 하는 점에 많은 의문이 들고 있다.


 


 또한 공사 막바지에 양윤재 본부장을 비롯, 관련 공무원들이 재개발과 관련한 비리혐의로 구속된데서 잘 나타났듯이 복원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될 청계천 주변 재개발 사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청계천 복원이 구상되고 착공에 들어갔을때부터 끊임없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 온 시민단체들의 연대모임인 '올바른 청계천복원을 위한 연대회의'는 11월2일과 3일 양일간 '서울시 청계천 사업평가 토론회'를 개최,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복원사업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11월2일에는 역사/문화 분야와 시민참여 분야, 3일에는 환경분야와 도심재개발 분야로 나뉘어 진행되는 이번 토론회에는 참여 시민단체의 전문가 뿐만 아니라 학계와 언론계 그리고 서울시 관련부서 공무원들이 함께 참여하여 진정 시민이 주인되는 청계천의 모습은 무엇이며 이를 위한 해결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를 벌이게 된다.


 


 다음은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이 발제한 '역사와 문화를 정치도구화하는 청계천사업' 전문


 


* 자세한 토론회 자료집 내용은 첨부된 파일을 참조해주세요.


 


역사와 문화를 정치도구화하는 청계천사업


Ⅰ. 들어가며


 가짜(fakelore)가 정통(folklore)을 밀어내는 세계적인 현상(코카콜라와 맥도날드 햄버거와 함께 침범한 디즈니랜드 류의 hyper culture)이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침투했다.


 


 반세기만에 시멘트구조물 아래 갇혀있던 청계천이 새로운 모습으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에는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가짜인 콘크리트 포장과 겉치레 허위 화장(국적 불명의 조경)이 정통 문화인 600년 고도의 산실 청계천을 밀어내 버린 골이 되고 말았다.


 


 청계천 재건은 단순히 고가도로를 뜯어내고 물을 다시 흘러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대 한국사회의 유물이었던 개발과 성장위주의 도시정책에서 역사와 문화, 환경을 먼저 고려하는 인간중심적 정책으로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했어야했다. 서울은 일제시대 이후 본래의 모습을 잃고 파괴되어 왔으며, 개발독재시대에는 시멘트로 대변되는 회색 빛 도시였다. 이러한 왜곡된 근대 서울의 모습을 바로잡고자 청계천 복원이 논의되었으며 시작되었다.


 


 지난 시절의 천박한 자본주의로 인한 개발지상주의를 극복하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우리 역사와 문화를 재평가하고 살펴보자는 활동이 시민중심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청계천도 같은 경우 이다. 누구보다도 박경리 선생과 노수홍 연세대 교수 등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90년대부터 청계천 복원을 통한 생명 복원을 외쳤으며, 광야에서 외치던 이들의 목소리는 2002년 드디어 여론과 위정자들을 깨우쳤다.


 


 이는 애초 서울시에서 내건 청계천 재건사업의 의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는 재건사업을 실시하면서 청계천 재건사업은 ‘600년 고도 서울의 역사성과 문화성 회복’, ‘자연과 인간중심의 친환경적인 도시 공간 창출’을 통한 ‘21세기 문화 · 환경도시 서울’을 조성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정부와 일부 지자체도 이에 편성해서 온갖 정책에 문화나 전통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가장 첨예한 대립점이 서울시장 선거에서의 청계천복원 공약이었다.


 


Ⅱ. 『복원』이라는 단어의 의미


 최근 들어 훼손되고 사라져간 문화유산에 대해서 복원이라는 용어가 무분별하게 남발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문화(문화재)에 대한 원형복원은 불가능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복원이라는 단어에는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고 싶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그대로 보여주는 지극히 폭력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이 청계천 역사문화 복원, 황룡사 복원을 주장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욕심을 역사·문화 복원이라는 미명으로 감추고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최고의 권력가인 흥선대원군조차 경복궁을 다시 지으며 ‘경복궁 중건’이라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청계천은 조선의 중심인 한양의 도성궁궐과 함께 600년의 역사가 흐른 곳이다. 그런데 청계천을 겨우 2년 넘은 공사로 복원(?)을 했다고 야단법석이다.


 


Ⅲ. 청계천 사업 과정의 반문화적 행정과 비민주성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복원사업을 핵심정책으로 내걸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그는 과연 올바른 청계천복원사업을 펼쳤는가?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복원사업은 복원을 빙자한 청계천개발 사업이었다. 그것은 문화와 환경을 내세워서 개발을 강행하는 신개발주의의 전형적 예이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문화재 보존론의 대변자인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명박 시장의 신개발주의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말았다.


 


 2002년 봄에 이명박 시장이 청계천복원 공약을 들고 나왔을 때,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그것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명박은 대표적인 개발업자로서 그의 청계천복원 공약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대의 요청을 시민사회가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후자 쪽이 중심이 되어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복원사업에 대응하게 되었다.


 


 이명박 시장도 시민사회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시민의 광범한 동의를 얻고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시민사회의 참여는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삼각체제’로 청계천복원사업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를 구성해서 복원의 내용에 관한 심의를 받고, 그에 따라 청계천복원추진본부가 사업을 진행하도록 하며, 이를 위해 청계천복원연구지원단이 연구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는 시민단체의 대표, 학계 전문가, 서울시의원, 서울시 공무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니까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는 말 그대로 ‘시민위원회’는 아니었다.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의 논의와 결정은 애초에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서울시는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를 다분히 형식적으로 운영했다. 이에 항의해서 최열 당시 환경운동연합 대표는 ‘청계천복원사업은 결코 올바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시민단체의 대표들과 사명감을 갖고 참여한 일부 학계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청계천복원사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2003년 2월에 기본계획에 대한 심의가 끝나자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대해 서울시는 거의 ‘능멸’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 2003년 9월의 서울시의회에서 일어났다. 양윤재 당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장이 심재옥 민주노동당 시의원의 질문에 대한 공식답변에서 멀리 속초까지 기본설계를 심의하러 간 시민위원들을 가리켜 ‘온천에 목욕이나 하러 간 사람들’이라고 망언을 했던 것이다.


 


 2004년 2월에 서울시는 실시설계의 심의를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요청했다. 이에 대해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는 심의를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3월에는 역사문화분과장이었던 김영주 선생과 간사 위원이었던 홍성태를 비롯해서 시민단체의 대표 강내희, 황평우들이 이명박 시장과 양윤재 본부장을 문화재파괴 및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지검에 형사고발했다. 이 사건은 마무리된 것이 아니다. 이어서 5월에는 권숙표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위원장이 항의사퇴 했으며, 이와 함께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의 실시설계에 대한 심의거부와 여러 지적을 무시하고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개발사업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결국 2004년 9월 16일에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참여한 시민단체의 대표들과 사명감을 지니고 참여한 일부 학계 전문가들은 9월 18일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이명박 시장의 잘못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두 항의사퇴 했다. 이로써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명박 시장은 ‘삼각체제’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시민사회는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올바른 청계천복원을 위한 시민연대’(청계천연대)라는 연대체를 만들어서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개발사업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청계천연대는 시청앞에서 수시로 기자회견을 열어 청계천개발사업의 문제를 지적했고,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을 중심으로 올바른 청계천복원사업의 방향을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노력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서울시의 잘못된 행정에 대처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서울시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울을 지역으로 여기는 시민운동과 여러 시민운동들 사이의 굳건한 연대가 대단히 중요하다.


 


 시민사회는 이명박 시장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 청계천복원사업은 결국 청계천개발사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명박 시장의 잘못을 바로잡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는 이명박 시장의 잘못을 기록하고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시민사회의 비판을 완전히 무시하고 양윤재 본부장을 부시장에 임명해서 엄청난 청계천지역재개발 부패사건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Ⅳ. 청계천 문화재 중건의 문제


Ⅳ-Ⅰ. 청계천 설계와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미비


 청계천 개발사업의 사업명을 보면 개천을 복원하여 고도(古都)의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사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모전교(毛廛橋), 광통교(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水標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영도교(永渡橋)의 다리유적이나 개천의 호안석축을 모두 파괴하고 홍수에 대비한 통수로 설치 사업 같은 것이었다.


 


 청계천은 태종 11년(1411) 구거(溝渠)를 개착하기 위해 개거도감(開渠都監)이란 관청을 만들어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역부 52,800명을 동원하여 한 달 동안 개울 정비 사업을 하였다. 그 뒤 영조36년(1760)에는 준천소를 설치하고 한성부와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의 인력을 동원, 관원 157명, 역군 215,380명(준천소좌목)이 57일간 개천 정비 사업을 하였다. 영조 49년(1773)에는 개천 양안을 석축으로 보수하였는데 금위영, 어영청, 훈련원의 군사들이 2개월간 작업하였다.


 


 영조는 친히 왕세손(후에 정조)을 데리고 광통교에 나와서 석축완성을 살피고 이 일을 주관한 당상관과 금위영, 어영청의 대장에게 가자(加資)하고 나머지 책임자에게 말을 하사 하였다. 영조가 친히 준천현장에 나온 사실을 그림으로 그린 준천친림관역도(濬川親臨觀役圖)도 있다.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은 준천가(濬川歌)를 짓기도 했다. 준천가 구절 속에 “땅에 있는 맑은 위수(渭水) 장안을 관통하여 쉬지 않고 흐르네, 열두 무지개다리 맑은 하늘에 솟아있고 삼영(三營)에서 쌓은 석축 흐트러짐이 없네, 맑은 물결 찰랑거리고 수양버들 그늘지네.” 이 준천가는 영조시대 청계천의 경관을 말해준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준천사실” “한경지략”, “동국여지비고” 의 기록에는 모두 개천(開天)으로 표기되어 있다. 청계천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16년(매일신문)부터 보인다.


 


 청계천은 이와 같이 서울의 상징적 도시 유적인데 복원사업은 하천법의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수표석이 보물 제838호이고 수표교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므로 수표석의 기단과 수표교의 기초석이 청계천 속에 그대로 남아있어 문화재보호법의 규제를 받아야 했다. 청계천 복원설계는 발굴조사를 선행하여 그 결과에 따라 복원설계를 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청계천은 조선왕도의 도시하천이면서 유물이 많이 매장 되어있을 습지이므로 조선시대 동전이나 자기편, 목기편 등 생활용기가 묻혀있는 곳이었다. 조선의 도시계획의 토목기술사를 조사 연구하여야 할 중요한 유적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모두 포기하고 통수로 공사를 먼저 발주하여 진행시켰다.


 


 청계천복원공사의 과정을 보자. 2003년 7월 1일 청계고가 철거시작, 2003년 9월 30일부터 12월 10일 까지 유적의 시굴조사, 2003년 12월 11일부터 2004년 7월 1일 까지 180일간 발굴조사, 발굴조사는 광통교지, 수표교지, 하랑교지, 효경교지, 오간수문지, 호안석축을 대상으로 하였다. 발굴조사는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담당하여 퇴적층조사와 지정말목의 수종조사까지 성실히 수행하였다. 광통교는 해체공사에 입회하여 조사한 것이었다. 발굴결과 통수로 설계는 발굴된 유적을 완전히 무시한 설계이므로 유적을 보호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시민단체는 2004년 3월 5일 유적보존을 위해 시장을 검찰에 고발하기도 하였다. 마지못해 3월 6일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지역 10m 이내는 통수로 공사를 중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4월 9일 문화재청은 광통교와 광통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를 중요문화재로 가지정하였다.


 


 1월 12일 문화재 사적분과위원회는 광통교 및 교지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의 문화재 현상변경에 대하여 상세한 설계도를 작성하여 심의를 받아 시행하게 하였다. 2004년 4월 16일 문화재사적분과위원회는 수표교와 오간수문은 원위치에 복원하고 광통교는 상류로 이전하여 복원하게 의결하였다. 2005년 1월 21일 시적분과위원회는 광통교와 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을 사적으로 지정키로 의결 하였다. 호안석축 1단을 저수로 바닥 원위치에 복원하게 하였다. 저수로 변의 조잡한 파석의 산석 쌓기는 전통양식이 아니므로 발굴된 호안 유적의 양식대로 안전감과 접근성이 좋은 평축 축대로 쌓도록 요청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계천 개발 사업 초기 서울시는 지표조사에 대해 전혀 준비가 없었고, 시민사회의 요구에 마지못해 지표조사를 실시했으며, 지표조사 결과 문화재위원회에서 발굴의견이 나오자 이명박 시장과 양윤재씨는 돌덩어리가 가지고 왠 난리냐 라며 그 들의 반문화성을 어김없이 표출하였으며, 수표교 남측 교대는 발굴 조사를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부지 매입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는 숫자 공포주의를 내세우며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다.


 


 청계천 사업은 생태적, 환경적, 구조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서울의 역사와 문화유산의 복원과 활용을 염두 해두면서 600년 도시 형성의 맥락과 연계된 긴 호흡으로 이루어져야했었다.


따라서 2003년 7월1일부터 당장 철거를 시작할 것이 아니라 지표조사를 토대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발굴조사가 선행되어야했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청계천은 600년 도시의 배수구였으며 600년 도시생활사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곳이다. 600여 년을 인간들의 온갖 모습들의 잔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청계천이다. 단지 석재와 유구가 남아있는 곳에 부분발굴을 하겠다는 서울시의 짧은 판단에는 문제가 있었다.


 


 청계천에서 발굴되었던 유물들이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등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들이 규명되는 것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치와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명심해봐야 할 것이다. 청계천 퇴적물에는 600여년 인간의 희노애락을 간직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이기에 당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묻혀진 역사를 찾아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우리는 배고픈 1940~70년대와 배부른 1990~ 2000년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파괴하고 훼손시킨 유적지(근대 문화유산과 생활사 포함)들이 많이 존재한다. 과거시절이야 모르고 지났다고 할 수 있지만 일방적인 개발론자들은 청계천 사업에 긴 호흡과 합리적이고 다양한 인류문화상태의 근본적인 점검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가 분명하게 예단할 수 있는 것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간직한 현장을 단 몇 개월의 탁상공론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새만금이나 시화호 같은 사례가 재발할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청계천 사업이라는 것이다.


 


Ⅳ-Ⅱ. 문화재 중건 문제


 청계천 시점부에 자리잡은 모전교는 원형을 완전히 무시한 이명박식 다리가 되었으며, 광통교는 제자리를 떠나버린 외로운 섬이 되어버렸다. 광통교 중건 공사 중에는 콘크리트 하수관로 때문에 몇 백 년 전해온 광통교의 바닥돌을 무단으로 깎아버렸고, 서울시는 호된 질책을 맞고는 하수관로를 이동시켰다.


 


 중건한 광통교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화강암 조각의 기법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소개할 수 있는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적 가치는 상실되어있다. 또한 조선시대 다리공사의 토목기법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으며, 1800년경 확장된 광통교의 흔적을 살리지 못해 역사성마저 상실한 광통교가 되고 말았다.


 


 청계천 시궁창 밑에서 마치 고대 그리스 유적의 신전처럼 당당히 나타났던 양측면의 석축들은 이리저리 그라인더로 가공되어 신형부재들 사이에 초라하고 지친 모습으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콘크리트옹벽에 부착한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으로 행차한 모습을 그린 “반차도”는 원래 광통교 주변에 있어야만 당시의 역사를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장통교 옆에 부착했다. 이것은 시민이나 학생들로 하여금 역사를 왜곡해서 인식할 수 있는 중대한 실수가 되는 것이다.


 


 수표교의 경우는 문화재 위원회에서 “원위치에 온다”라는 결정을 통보했지만 서울시는 다른 공사는 2년에 마치면서 수표교의 안전성 검사를 핑계로 대며 아직까지 검토결과를 공식적으로 보고조차 하지 않고 있다. 수표교 남측의 교대(다리벽) 매입에 몇 백억이 든다는 모호한 숫자공포주의를 흘리며 수표교 제자리 찾기에 핑계만 대고 있다. 시장 한마디에 몇 십 억 원을 써가며 다른 다리의 디자인을 바꾸는 이율배반을 보이면서 말이다.


 


 오간수문 역시 문화재위원회에서 발굴된 기초석들을 후대에 도성을 중건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원위치에 놓으라고 결정했으나 서울시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있다. 아마도 서울시의 오만은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유일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더욱이 사적으로 지정된 광통교 터, 수표교 터, 오간수문 터 주변 건물의 고도제한을 완화해줄 것을 강요하고 청계천 문화재 중건 사업을 감독해야 할 문화재청은 고층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손을 들고 말았다.


 


Ⅴ. 맺음말


 재건 이후 청계천 인근 지역은 과연 어떻게 변모되어갈 것인가. 벌써부터 내로라하는 건설업체들이 황학동, 숭인동 등 일대에서 주상복합 건물을 분양하고 있으며, 일대의 땅값은 하루가 달리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세운상가 4구역의 재개발 계획에 따르면 높이가 90미터에 이르는 최고 25층짜리 건물이 대단위 쇼핑몰로 들어서게 된다. 한술 더 떠 올해 2월에는 ‘도시 및 주거환경 기본계획’을 통하여 도심 재개발 구역에 들어서는 주상복합 건물에 대하여 용적율 최대 1,000%, 높이132미터에 이르는 건축이 가능하도록 제한을 완화하여 버렸다.


 


 이런 계획대로라면 고밀도의 개발을 통하여 청계천 일대가 빌딩 숲에 갇혀버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로써 야기되는 고층, 고밀화는 다시 교통난과 환경적 악영향을 불러 올 것이며, 서울의 도심은 더욱 숨 막히는 곳이 될 것이다. ‘이 일대의 부동산 개발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앞으로 개발 열기는 더욱 달아오를 것’이라는 지역 부동산업자의 말은 차라리 섬뜩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원하는 청계천은 이와는 다르지 않은가. 비록 좁지만 물을 따라 푸른 산책로가 이어지고, 그 양쪽의 건물들도 적정한 높이로 물러나 시야를 터주며, 그 사이사이로 길거리 농구장이든 쌈지 공원이든 도심의 휴식처가 만들어지는 그런 청계천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막대한 세금을 감내하고, 수년간 공사 먼지와 교통 불편을 참아가며 기다려온 시민에게 100 미터가 넘는 주상 복합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내민다면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청계천 재건에 소요된 엄청난 공공예산의 투여로 유발된 경제, 환경적 부가 가치를 개발사들과 토지자본에 고스란히 넘겨주게 되는 꼴이다.


 


 높이와 규모로 첨단을 자랑하던 시대는 지나지 않았는가. 수백 년 동안 서울의 역사가 흘렀던 이곳에는 많은 빈틈을 갖도록 다양한 용도가 복합되어있는 저층·저밀도의 개발이 맞다. 소수를 위한 수십 층의 주상복합보다는 시끌벅적한 난장의 혼란이 낫다. 낮을수록 좋다. 작을수록 좋다. 그 나머지는 사람이 채운다. 사람이 모이면 문화가 꽃핀다.


 


 또한 서울시는 청계천에서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의 문화를 도외시하였다. 서울시는 청계천 재건공사를 시작하면서 청계천일대 구간을 ‘노점상 절대 금지구역’으로 지정하고 노점상을 동대문운동장에 ‘풍물시장’이란 이름으로 몰아내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풍물시장에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은 채 수수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청계천에서 오랫동안 삶을 이어 온 서민을 쫓아내고 주변지역의 고층·고밀도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개발 사업은 양윤재 전 서울시 부시장의 뇌물수수 사건에서 보이듯이 온갖 비리로 얼룩진 것이며, 서울의 문화성 회복이 아닌 구시대 개발주의의 답습일 뿐이다.


 


 문화재 훼손에 대한 재수사, 문화재위원회 결정인 오간수문 바닥돌 원위치, 수표교 이전 중건 등 장기과제로 남은 문화재 중건 문제, 국적도 없는 다리 디자인과 왜식 조경, 청계천의 지천과 상류천 복원 및 유지용수 문제, 청계천 변의 좁은 인도문제, 장애인의 접근권과 이동권 문제, 청계천 주변지역의 산업개편과 재개발 문제 등 처리되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지금 중랑구 하수종말처리장 구석에는 600년 서울의 역사를 간직한 조선시대 최고의 다리 부재들이 오물과 잡초속에 방치되고 있다. 서울시와 이명박 시장은 이러한 역사의 이율배반행위를 무엇으로 변명할 것인가 묻고 싶다.


 


 이제 청계천은 우리나라 문화재 재건 공사 중 최악이라는 오명을 쓰게 될 것이지만 언론은 가짜로 포장된 청계천을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한국에는 복개된 하천을 연 시장이나 도지사는 많다. 이들 모두가 대통령후보가 되어야하는가 묻고 싶다.


 


 그럼에도 청계천에만 지나친 억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팽배하게 잔존하는 서울중심주의의 발로이자 서울중심정치의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회악이다.


 


 이제 이명박 시장은 이명박식 청계천 재건을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는데 악착같이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청계천문화재위원으로서 역사와 문화유산 앞에 죄인이며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문의 :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766-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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