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경실련을 고대하면서

관리자
발행일 2009.11.18. 조회수 397
칼럼

 


더 나은 경실련을 고대하면서
                                                  


조수종(청주경실련 상임공동대표)


 


 


  20년 전 경실련의 탄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명색이 반세기 넘게 의회민주주의를 해왔는데도 소위 '꾼들의 정치술수' 만 난무했을 뿐 국민들의 답답한 마음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어주지 못 하던 시대에, 낯익은 정치인도 아닌 일반 시민들이 생소한 단체를 만들어 '쓴 소리'를 마구 해대니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 국민들은 당시 경실련이 발표하는 성명서나 입장표명에 크게 공감을 하며 속 시원해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떤 이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의아해 했는가 하면, 저러고도 무사할지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특히 경실련이 주도했던 공명선거 캠페인이나 낙천-낙선 운동, 공직후보자 자질검정을 위한 방송 토론회, 공약이행 감시운동, 분권 및 국가균형발전 촉구 노력 등은 오늘날 정부정책이나 정치인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 및 견제의 전형으로서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 이로써 경실련이 우리 사회의 선진화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있어 시민단체는 일종의 필요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의회제도가, 그리고 지방자치가 제대로만 작동한다면 굳이 시민단체가 존립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비록 시민단체가 시민의 자발적 활동으로 운영되는 비정부, 비영리 조직이라 해도 나름의 사람과 돈, 그리고 시간과 열정이 소요되게 마련이다. 이들이 지금도 필요한 이유는 제도권이 시민들의 아픈 데를 제대로 어루만져주지를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실련이 창립될 당시만 해도 6.10 민주항쟁과 88올림픽을 거치면서 경직된 사회 분위기가 다소는 풀렸지만 민중이 제 소리를 낼 형편은 아니었다. 정치권도 나름대로는 전에 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외치긴 했어도 국민들의 속내를 알아주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이런 시기에  경실련이 나타나 시민들이 하고픈 소리를 대신 해주는 것을 보면서 모두들 후련해 했고, 이에 자극 받은 각양각색의 시민단체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 시민단체는 기존의 관제적 사회단체와는 그 성격이 판이했다. 누가 지시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법적 뒷받침이나 예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할 일을  정하고 필요한 돈이나 사람도 스스로 모았다. 그러다 보니 회원에 자격조건이 있을 리 없고, 단체의 설립이나 해체도 자유여서 무질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이들 단체에 권위를 실어 준 것은 도덕적으로 흠 없는 구성원들이 모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찾아서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부나 의회가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면 시민단체는 점차 없어져도 좋을 것이다. 지금도 시민단체가 존재하고 있고,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가끔씩은 그들이 하는 일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우리사회가 아직은 시민단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도 많이 좋아졌다'거나 '선진국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등의 말을 자주 듣는다. 이는 곧 우리사회가 많이 개선되고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경제만이 아니다.  정치를 비롯하여 사회, 문화 등 각계를 망라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변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변화의 밑바탕에 정부의 노력과 국민의 협조가 있은 것은 물론이지만 지난 20여년에 걸친 시민단체의 비판과 견제, 그리고 솔선수범을 결코 가볍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현재 우리나라에는 300여종, 2만 5천여 개의 시민단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현대적 시민단체의 효시는 1989년에 탄생한 경실련이다. 그 후 수많은 단체들이 생멸을 거듭했지만 지금껏 살아있으면서 국민들의 뇌리에 시민단체의 리더로 각인되어 있는 것도 역시 경실련이다. 결코 자화자찬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경실련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들 한다. 물론 큰 소리만 친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꼭 필요할 때 올바른 소리를 내는 것이 좋은 것이다. 최근 경실련의 목소리가 작아진 것은 조직의 규모나 역할과도 상관이 있지 않나 싶다. 우선 경실련의 규모는 전에 비해 겉보기에도 현저히 왜소해진 느낌이다. 관계자는 물론 관심을 가진 국민도 적어졌다. 또 지도부의 면면도 중량감이 크게 떨어져 보인다.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명망가는 별로 없다는 뜻이다. 이는 경실련이 사회의 관심권 밖으로 점차 밀려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를 놓고 관계자들은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또 역할(영향력)도 많이 줄어져서 필요할 때 제 몫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영향력의 크기는 조직 구성원의 단합과도 비례한다. 중앙과 지방조직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한 큰 영향력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경실련 구성원의 대동단결을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때 이다. 
 


  내가 경실련을 안 것은 15년 전 쯤 이다. 국민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경실련 조직이 중앙에 하나만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각 생활권별로 나누어 지역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에 따라 청주에서도 경실련을 만들었다. 나는 당시 청주 경실련 창립멤버로 참여했지만 시민단체의 목적이나 운영 등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정책위원장 및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고, 중앙의 상집위원을 비롯 중앙위원 등도 해 보니 경실련에는 조직상의 문제 뿐 아니라 운영상의 허점도 적지 않게 보였다. 물론 시각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찬란한 전통을 지닌 경실련이 이래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후 지역 경실련 협의회에도 관심을 기우려 참여해 보았지만 지역별 이해관계가 뒤얽혀서인지 그 역시 쉽지 않았다. 
 


 경실련은 한국 시민단체의 효시요, 20여 년간 시민단체의 리더 자리를 지켜온 단체다. 그런 단체가 지금처럼 침체되어서는 곤란하다. 체제를 정비해서 다시 한 번 우뚝 서야 한다. 앞으로도 시민단체의 역할이 필요한 우리사회에서 경실련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나는 이를 위해서 다음 2가지를 제안코자 한다. 


 첫째는 조직의 정비이다. 지금 전국에는 30여개의 지역 경실련이 있다. 이들은 지역 경실련 협의회를 만들어 중앙과 매사에 각을 세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중앙조직이 없음을 개탄하고 있다. 지방 조직에서는 지금의 중앙경실련을 서울경실련으로 보는 것이다. 즉 서울 경실련도 지역 조직의 하나라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조직상의 혼돈과 혼란을 두고서는 조직에 바탕한 올바른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지난 중앙위원회에서 결의를 통해 통합 원칙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니 지켜볼 일이다.


 둘째는 명색이 중앙경실련이라면 각 지역 조직을 명실공히 포용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수도권 규제완화반대 문제만 해도 중앙(서울)이 입을 닫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정부의 수도권 규제완화가 국가균형발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대승적 견지에서 백년을 내다보고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중앙경실련이 지역주의에 막혀 소아적 발상을 해서는 전국의 지역 경실련을 어찌 이끌 것인가? 관용과 포용의 지혜가 아쉬운 실정이다.


 


 경실련 창립 20주년! 앞으로 20년은 지난 20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게 시민사회의 바람이고 경실련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구성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조직 내부의 단합은 물론이고 더 많은 시민사회의 협조와 성원도 끌어내야 할 것이다.


 



<약력>
전 경실련 중앙위원회 부의장
    중앙위원회 위원
    경실련 상임집행위원
현 청주경실련 공동대표
    청주경실련 정책위원장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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