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경실련 활동가가 바라는 2024 한국 사회

회원미디어팀
발행일 2024.02.05. 조회수 50335
스토리

[월간경실련 2024년 1,2월호][특집]

경실련 활동가가 바라는 2024 한국 사회

 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많은 분이 작년과 다르게 힘차고 희망 가득한 새해를 바라고 계실 텐데요. 2024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경실련 활동가들이 바라는 2024년 한국 사회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청룡의 기운을 가득 담아 경실련과 함께 ‘2024년 경실룡이 나르샤~’ 지금 시작합니다.

 

죽이지 않고 대화하는 사회

가민석 사회정책팀 간사

“싸우는 이유가 뭔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영화 「고지전」은 이유는 잊은 채 생존과 죽음만을 거듭하는 전쟁의 참상을 보여준다. 6.25 전쟁의 총 사망자 4백만 명 중 3백만 명,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2년 동안 지도 위 1cm도 안 되는 땅을 빼앗기 위해 그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먼저 죽여야 하는 원리는 전쟁사를 관통하여 선거 한복판을 장악하고 있다. 내 정책의 우월성보다 상대의 비윤리성을 강조하는 혐오정치가 훨씬 이해하기 쉽고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싸움의 이유를 잊은 채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된 사회에서 국민은 끝없는 고지전을 치르며 소모되고 있다. 
 생각이 달라도 대화하고 설득하는 사회를 원한다. 이제 맘에 안 든다고 쏴 죽일 수 없고 오늘 봤던 정적을 내일도 봐야 한다. 지금까지는 관성에 따라 상대를 없애는 생존전략을 취했지만, 점점 질문하고 합의하며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새로운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될 것이라 믿는다.
 2024년과 4월에 있을 22대 국회의원 선거도 그 과도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직선제를 시행한 지 아직 100년이 채 안 됐다. 혐오와 차악의 정치가 아닌 최선의 정치를 위해 아직 더 많은 시간과 사회적 학습이 필요할 수 있다. 매번 유권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시민단체의 정책선거 시도를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싶다. 

 

2024년 신뢰가 회복되는 사회를 꿈꾸며

권오인 경제정책팀장

 최근 우리 사회는 정부, 정치권, 기업, 시민 등 각계각층 간 신뢰가 무너져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특히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는 과언일 수도 있지만 붕괴되었다는 느낌까지 받습니다. 시민들의 눈에 비친 정부와 정치권의 모습이 민생은 뒷전으로 하고 온갖 사회적인 갈등유발과 권력다툼, 정쟁만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쟁만 일삼던 정치권이 가끔 의기투합할 때는 경제권력인 재벌들을 위한 법 제도를 만들 때뿐입니다.
 시장 구성원 간의 신뢰도 약해져 있습니다. 이는 기업들의 불공정행위가 만연해져 있고 재벌과 대기업들의 경제력 남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기업과 소비자 간의 신뢰도 무너져 있습니다. 
 2024년 우리 경제의 전망은 어둡고 경제 양극화와 불평등은 더욱 심화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국가 모든 구성원 간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담보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회복이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와 정치권, 기업이 민생을 위한 정책과 윤리경영 실천을 통해 신뢰 회복을 위한 선두에 서야 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 사회의 신뢰가 회복되어 거리에서 웃는 시민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갑진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로, 서울로

박지훈 기획연대팀 간사

 정들었던 천안을 떠나 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 상경한 지 올해로 벌써 4년이 됐다. 서울로 상경해서 적응하기까지 순탄치 않은 과정들이 너무 많았다. 보증금이 저렴한 집을 찾기 위해 한 달 동안 서울 방방곡곡을 돌며 10명의 공인중개사를 만났고 더 저렴한 월세를 위한 보증금 협상까지! 무수히 많은 난관을 거쳐 지금의 동대문구 회기동 대학가로 올 수 있었다. 
 높은 집값과 치열한 경쟁,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속…….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와 1호선 지하철을 타자마자 ‘나’라는 존재는 없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 자연스럽게 ‘나’를 맡긴다. 콩나물시루 속 “나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머금고 눈을 떠보니 사무실 컴퓨터 앞이다.
 오늘도 9시 뉴스에서 지방소멸에 관한 기사가 나오고 있다. 지방대학의 위기, 청년층의 수도권 이동, 지역소멸에 대한 문제 등 지역의 위기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지역소멸에 관한 얘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히 제기된 문제이지만 정부에선 명확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오는 경쟁 구조 속에 출산율과 삶의 질은 더 떨어지고 있다. 
 수많은 정치인이 청년을 외쳤지만 청년을 위한 정책은 없다. 그들에게 청년은 선거용 자원봉사자일 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말만 청년을 외치는 것이 아닌 지방소멸을 막고 출산율을 올릴 수 있는 실효적인 정책이 나오길 고대한다. 지금도 가파르게 한국의 소멸 시계는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진영 전사’보단 국민 섬기는 정치인이 많아지길

서휘원 정치입법팀장

 22대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4년, 정치권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듬기보단, 당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진영 대결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 지도부가 막강한 공천권을 가진 상태에서 국회의원은 국민의 봉사자가 아니라, 진영의 전사를 자처했다. 지난 4년 주요 거대양당의 기득권은 더 강화되었고, 국회에서는 각종 막말과 선동, 혐오정치가 뒤따랐다. 이제 선거가 다가오자, 정치권은 또다시 국민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고자 각종 포퓰리즘 공약과 정책을 내놓으며,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한술 더 떠서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정책을 국민을 위한 정책으로 포장하며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기도 한다. 이행하지도 않으면서 4년마다 반복해서 내놓는,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공약도 또다시 선보이고 있다. 경실련에서는 국민을 섬기는 정치인이 더 많이 총선에서 당선될 수 있도록 기득권 양당 구도를 타파하는 정치 관계법 개정 운동, 후보자 자질검증 운동, 정책선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2대 총선이 치러지는 올해는, 자기 밥줄을 위해 당 지도부에 봉사하는 진영 전사보다는, 국민을 섬기는 정치인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오세형 경제정책팀 부장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이 주창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어젠다는 30년 가까운 세월에 그 의미가 희미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오늘, 이 순간에도 매우 중요한 어젠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길 희망한다. 
 윤석열 정부는 자유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취임 후 지금까지 보인 행보가 정말 자유를 말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언론 재갈 물리기를 비롯하여 노동 적대적 정책 추진, 검사 일색의 인사 등 민주주의와는 멀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의 토대 위에서 건강하게 설 수 있다. 다원주의적 기반에서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로의 회복을 바란다.
 총선을 앞두고 각종 포퓰리즘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양극화를 조장하는 부자 감세 기조는 강화되고 있다. 재벌 회장들에게는 부정의한 면죄부가 주어진다. 시장경제가 공정하게 기능하도록 경제정의와 재벌개혁 등이 실현되어야 한다.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극에 달하는 이 시대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회복을 꿈꾼다.


권력을 자유롭게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회를 바라며

윤철한 기획연대팀장

 최근 강성희 국회의원(진보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국정운영 기조 변화를 요구하다 대통령실 경호원들에게 입이 틀어 막히고 강제로 끌려 나가며 논란이 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경제, 부동산, 여성, 노동 등 분야에서 정책 후퇴와 독선적 국정운영과 불통 정치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중 하나가 정부의 언론 정책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권 초기에 언론과 적극적인 소통을 이어갔다. 그러나 대통령과 정부에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기사가 늘어나며 조금씩 언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지난해 MBC의 ‘바이든-날리면’ 보도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언론사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KBS의 친정부 여권 인사 교체, 정권에 비판적인 프로그램 폐지와 관계자 좌천, KBS 압수수색, TV 수신료 분리 징수, 포털뉴스제휴평가위원회 활동 중단 압박 등 본격적인 언론 길들이기에 돌입했다. 여기에 가짜뉴스를 잡겠다며, 방송통신심의워원회에 ‘가짜뉴스 심의전담센터’를 만들어 언론 기사를 사전 검열하겠다는 의지마저 노골화하고 있다.

 심지어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은 가족, 친척, 지인들을 동원해 민원을 사주하며 뉴스타파, KBS, MBC 등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언론을 무더기로 징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더욱 가관은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셀프 민원은 덮고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제보자를 색출하겠다며 방송통신위원회 직원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감찰과 경찰 수사까지 진행되고 있다. 
 ‘기레기’, ‘가짜뉴스’ 등 현재 우리나라의 언론 환경을 말해주는 단어다. 정론과 저널리즘은 사라지고 돈의 논리가 언론사를 삼킨 지 오래며, 언론개혁이 중요한 의제 중 하나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틀어막고 국민을 속인다면 그 피해는 국민이 전부 질 수밖에 없다. 역사가 이미 이를 입증하고 있다.

 2024년에 바라는 한국 사회는 권력을 감시하고 권력에 쓴소리한다고 입을 틀어막고 통제하지 않는 언론 환경, 언론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는 사회다.


‘민’이 지배하는 상상력 넘치는 사회

이용준 경제정책팀 간사

 사이비 법치 정부가 들어서고 법정 드라마가 미디어를 장악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3법 △김건희 특검법까지 내리 거부권을 행사했다. 바야흐로 ‘민’에 대한 법의 독재(헌정주의) 시대다. 헌정주의자들은 법이 허락한 현실 외부를 상상하지 말라고 말한다. 법적 승인 없는 고통은 ‘비현실’이라며 성급한 낙인을 찍어낸다. 헌정주의는 시민의 상상력을 무력화하고 납작한 세계 속에 족쇄를 채운다.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 볼 때다.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유산은 개인의 ‘자기결정권’이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규정하는 힘을 스스로 지배하는 사상. 법이 ‘민’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민이 법을 지배한다는 사상. 즉 민주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이 게임의 규칙을 원하지 않을 때 폐기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권력을 말한다. 즉 민주적 법치는 소수의 욕망이 아닌 만인의 ‘권리를 가질 권리’를 수호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자기결정권은 신성불가침한 경제적 권리(소유권)만의 독재를 받는다. 평등할 권리(복지권), 정주할 권리(주거권) 건강할 권리(의료권) 삶을 향유할 권리(문화권) 등은 소수 자산가와 그들의 자산을 철통같이 지켜줄 사회 기반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인정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모두가 집 가질 수 없다”라고 말한 이유다.

 자본과 소수 자산가만의 민주인 헌정주의 사회. 사회학자들이 전망한 쇠우리(막스베버), 사물화(루카치), 스펙터클(드보르) 사회가 우리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상상해 볼 때다. 만민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기적인 민주 사회인가? 기득권층이 독점한 자폐적인 지식이 시민 위에 군림한 경직된 독재 사회인가? 한 줌의 소수를 위해 만민이 동원되는 야만의 시대를 이제 ‘시민의 힘’으로 끝장내보길 바라본다.


회의 출석은 국회의원의 기본이다

임정택 정치입법팀 간사

지금 국회를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다. 
“어떤 인물을 공천할 것인가?”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거대양당이 옥석 가리기에 분주하다. 다양한 안이 오르내린다. 평가 하위 30% 의원 감점 강화안, 선출직 하위 20% 공천 배제안, 다선 의원 경선 득표율 감산 등, 많은 말들이 있다. 이미 ‘컷오프 살생부’가 물밑에서 돌아, 이름이 오른 의원들은 사실 확인에 분주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절대 올려선 안 될 사람은 누구인가?” 
 인물 판단에 여러 기준이 있겠으나, 회의 출결 불성실 의원에게는 공천 기회를 줘선 안 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회의 출석은 국회의원 업무의 기본이자, 국회 홈페이지에도 버젓이 명시된 국회의원 의무이다. 
 우리 경실련은 정치권력 감시와 동시에, 유권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자, 제21대 현역 국회의원에 대한 다각적인 자질검증 운동을 해왔다. 본회의, 상임위원회 결석률 조사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두 번 놀랐다. 생각보다 많은 의원이 기대 이상으로 성실히 회의에 출석했다는 것 하나. 반대로, 놀랄 정도로 높은 결석률을 기록한 의원들도 있었다는 게 두 번째다. 
 본회의 결석률 조사 결과,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한 의원 3명의 결석률은 각각 20.1%, 19.4%, 19.3%였다. 상임위원회의 경우, 상위 의원 3명의 결석률은 높은 순서대로 26.5%, 21.6%, 21%였다. 회의 10회하면 두 번은 없다는 뜻이다. 한 의원은 본회의와 상임위원회 결석률 상위 3인에 동시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부족한 출결 성실도를 뛰어넘을 만큼, 결석률 상위 의원들의 여타 의정 능력이 뛰어난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 초, 중, 고, 대학교, 군대까지 나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출결 및 근태 허술한 사람치고 일 똑바로 하는 경우를 본 적 없다.

 

편견 없는 사회 
-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꼴을 또 봐야 하나?

정호철 경제정책팀 간사

 4개국에서 오랜 유학·직장생활을 접고 귀국했을 때, 우리 사회에 기대했던 한 가지는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백인보다 교육 수준이 낮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중국인과 비슷하다고 인지하는 외집단 동질성, 그리고 출신 및 학벌 편애와 차별, 차별의 동조, 집단갈등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편견은 특정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서 개성이나 능력을 무시한 채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감정적인 부정평가로 인해 선입견을 넘어 불이익을 주는 등 차별하는 것을 말한다(Sherif, 1961). 로버스 케이브 실험에서 보듯, 사람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싸우는 집단경쟁·갈등 상황에서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는데 혐오, 모방, 편애, 동조, 상대적 박탈감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파벌 간 학연, 지연, 이해관계에 얽매인 줄서기와 편가르기, 왕따와 혐오, 차별과 특혜, 이에 대한 동조와 모방은 편견을 부추겨 감정대립을 격앙시키고 그 무리에 끼지 못한 사람들에게 패배감만 남겼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꼴을 또 봐야 하나? 편견 없는 우리 사회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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