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운동이 직면한 도전과 나아갈 방향

관리자
발행일 2009.11.18. 조회수 403
칼럼

 


한국 시민운동이 직면한 도전과 나아갈 방향



박병옥(전 경실련 사무총장)


 


 


 지난 1989년 경실련의 출범으로 시작된 한국 시민운동의 역사는 2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빠른 양적 성장, 사회적 영향력의 증대, 그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민주화에의 기여라는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시민운동은 심각한 반동(反動)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반동은 단지 시민단체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억제하고 위축시키려 하는 것을 넘어서 의사표현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곧 시민단체의 존재와 활동의 제도적 근간을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촛불집회로 솟구쳐 오른 시민들과 그리고 시민단체들의 이러한 반동에 대한 저항은 모든 수준과 범위의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을 장악한 현 집권세력에 의해 최소한 일시적으로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현 집권여당과 이에 동조하는 일부 언론들과 극우세력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민운동에 대한 반동은 시민사회를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집단들의 근거지로 바라보는 시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신들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강화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판단아래 시민사회의 건강성과 시민단체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근간을 뒤흔들고, 시민단체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제약하기 위해 인적‧재정적 후원의 흐름을 차단하는 한편 그 주장과 활동들이 시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으려 한다. 명백한 정치단체를 시민단체로 둔갑시켜 시민사회의 여론형성을 왜곡하고 교란시킴으로써 현 정치질서와 정치세력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시민적 여론 형성을 차단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인 야당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정치적 헤게모니를 보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시민사회의 힘을 동원하려 한다.


 


 이 둘은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시민사회와 시민단체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과 접근방식은 동일하다. 정치적으로 바라보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시민사회를 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권의 시민사회에 대한 정치적 의도가 관철되게 되면 시민사회의 정치사회에 대한 독립성은 상실되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대립하게 되며 시민들의 신뢰와 지지는 엷어지게 된다. 시민사회는 더 이상 보편적인 시민사회적 가치와 권리를 추구하는 공적 공간으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시민사회로부터 제기되는 이슈는 모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는 정치적 이슈로 전환되고 인식되며, 우리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한 시민들의 동의와 역량을 이끌어내지 못하게 된다. 한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 가는 데에 필요한 세 축, 곧 정치사회, 영리영역 그리고 시민사회 중 한 축이 허물어져 더 이상 시장과 정부의 실패를 교정하는 한편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자원(自願)적 에너지를 모으는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고 시민단체 또한 지난 정부 시절 정치권과의 관계에서 독립성과 투명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획득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와 같은 정치권과 언론의 시민사회에 대한 정치적 개입의 빌미와 소재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현재 직면하고 있는 반동적 상황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또한 지적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시민단체들이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고 우리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활동들을 전개함에 있어 충분한 시민적 지지와 참여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현 상황에서 시민운동의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민주적 가치와 시민적 권익을 훼손하려는 시도에 맞서 결연히 맞서 싸우는 것이다.


둘째로는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자기 쇄신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 진정성과 성과가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는 정치권과의 투명하고 독립적인 관계 설정 등을 그 내용의 하나로 포괄하는 시민단체의 사회적 책임성을 높이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시민단체의 사회적 책임성은 시민단체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이해관계자들과의 관계 개념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정당과 정부, 기업, 다른 시민단체들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제 조직들, 그리고 시민단체의 존재 기반이며 목적인 시민에 이르기까지 책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반동적 상황을 지탱해주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담론과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깨뜨릴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난 시기 비전과 정책과 전략 모두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진보의 실체를 보았으며, 현재에는 탐욕과 불의로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비인간화하고 있는 보수의 실체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새로운 가치와 질서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담론의 개발은 현재의 만연한 가치와 질서를 극복하는 데에도 필요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내재된 자기모순의 누적에 의해 붕괴될 때와 그 이후를 위한 대비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시민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사회적 정체성의 확립과 시민적 검증과정을 거침으로써 또 다시 앞으로 20년의 전진과 도약을 위한 사회적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이러한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단체의 활동이 현재의 반동적 상황을 이끌고 있는 세력들이 짜놓은 ‘보수와 진보’의 틀, 보다 분명하게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가면을 쓰고 진행되는 정치세력 간 헤게모니 쟁탈전의 대립구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시민단체들의 동원과 배제의 구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민들이 시민단체들의 주장과 행동을 ‘정당‧정파’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특정한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고 그 비판이 정치적 이해관계나 호불호가 아니라 보편타당한 민주적 가치와 사회적 약자 및 다수 국민들의 권익에 기초한 것임을 신뢰할 때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상황을 80년대식의 민주 대 반민주 혹은 보수와 개혁의 단순 구도로 환원시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간 구분을 흐리게 하면서 ‘민주개혁세력 총단결’과 ‘반MB’를 외치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정파 간 기계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적 가치와 시민적 권익을 훼손시키려는 세력과는 결연하게 싸워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정치상황과 언론환경 하에서 이미 빠져 있는 덫에서 나와 시민운동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민들과의 공고한 재결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및 활동양식의 측면에서 매우 이질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이 동일한 혹은 유사한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제도정치에의 직접 참여 혹은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주된 전략으로 채택하는 시민사회단체들과 그렇지 않은 단체들, 사회의 보다 총체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변혁적 사회운동 단체들과 상대적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며 워치독(watch-dog) 역할에 충실하려는 단체들을 동일한 정체성으로 묶을 수는 없다. 오히려 본질적 차원에서 동일한 정체성을 갖는 그룹들로 분리‧정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시민단체 그룹들이 각자의 깃발을 들고 서로 다른 시민적 지지기반을 향해 투명하고 책임 있게 나아감으로써 시민들과의 결합의 총량을 확대하고 다양한 차원과 공간에서 각 그룹들이 가진 장점을 살려 민주적 가치와 시민적 권익의 옹호와 증대를 도모하는 것이 현재의 시대정신과도 부합된다. 그리고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약력>
전 경실련 사무총장
    경실련 정책실장
    경실련 기획조정실장
    지구촌 빈민퇴치 시민네트워크 운영위원장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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