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평등 가치와 개인적 성장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교육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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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20. 조회수 623
칼럼

사회적 평등 가치와 개인적 성장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교육을 위하여



김재춘 (경실련 교육개혁위원장)



학교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대단하다. 특히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에 대한 논란은 뜨겁다. 한편에서는 학교교육이 사회경제적 계층을 재생산하는 기능 (즉 빈부의 대물림 현상)을 막기 위해서 평준화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다른 편에서는 학교교육이 개인적 성장에 적합한 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평준화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준화 정책에 대한 이처럼 상반된 시각은 ‘학교’라는 공적 기구와 ‘교육’이라는 개인적 활동 간의 결합을 뜻하는 ‘학교교육’의 특수한 지위와 성격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공적 기구로서 학교는 빈부격차 해소라는 사회적 평등 가치를 추구해야 함을 강조하는 사람들과 개인적 활동으로서 교육은 개인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개인적 적절성을 유지해야 함을 강조하는 사람들 간의 의견의 충돌로 해석할 수 있다.


 



학교교육에서 학교라는 사회적 기구와 교육이라는 개인적 활동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한가?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격이 강했던 노무현 정권에서는 학교의 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더 강조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보수적 성격이 강한 이명박 정권에서는 개인적 활동으로서의 교육의 성격을 더 강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학교와 교육 중 어느 하나를 살리고 다른 하나는 희생시키는 ‘either/or’보다는 학교와 교육을 동시에 살리는 ‘and/both’여야 한다.



학교와 교육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교육 정책이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전에 학교와 교육이 만나서 오늘날의 ‘학교교육’이라는 맥락을 형성해 온 역사적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약 200여 년 전에 서구에서 등장한 근대 학교교육 체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분과 직업의 세습 제도를 대체할 수 있는 민주적인 제도로 환영받았다. 혈통보다는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 계발된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이후에 종사할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될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에 근대 학교교육 제도는 ‘위대한 민주화 기제’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근대 학교교육 체제가 등장한 초기에는 그리고 일부 국가/지역에서는 근대 학교교육 제도가 민주화의 기제로 작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 학교교육 제도가 점차 뿌리내리고 확대되면서 근대 학교교육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회적 평등을 이루는 민주화 기제로 작용하기보다는 사회적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이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근대 학교교육의 전통이 강한 나라일수록 공교육은 사회경제적 계층의 재생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며, 그 결과 학교교육을 통한 사회적 지위 상승이동은 더욱 보기 드문 현상이 되었다. 



학교교육의 불평등 재생산 현상 즉 빈부의 대물림 강화 현상은 우리나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해방이후 전통적인 계급사회가 붕괴되고 6.25전쟁으로 구질서가 무너지면서 그리고 동시에 근대 학교교육 제도가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학교교육은 진정으로 위대한 민주적 기제로 작용하였다. 금수강산을 굽이쳐 흐르는 수많은 개천에서 다양한  용들이 솟구쳐 오르면서 ‘개천에서 용나다’라는 표현이 일상화 되었으며, 학교교육을 통해 이른바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농산어촌의 서민들에게도 ‘개천에서 용나게 하는’ 학교교육은 삶의 희망이자 꿈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점차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선진화’되면서 학교교육의  민주화 기제는 그 효력을 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학교교육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맘껏 계발하고, 각 학생의 계발된 능력에 터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분배되던 학교교육의 선순환적 메커니즘이 사회경제적 지위 경쟁을 위한 총력적의 형태로 변질되면서 빈부의 대물림을 강화하는 악순환적 메커니즘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교육을 통한 지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학교교육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학부모들이 자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점차 사교육에 의존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우리 학교교육은 이중으로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첫째, 자기 성장이나 능력 계발을 위한 학교교육보다는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한 지위경쟁이 학교교육의 목적이 되었다. 둘째, 지위경쟁이 치열해지자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학교밖의 교육, 즉 사교육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학교교육의 목적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학교교육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왜곡된 학교교육은 학교라는 공적 기구로서의 사회적 평등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서도 실패했으며(그래서 ‘민주화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개인적 활동으로서의 교육 즉 학생의 지적/전인적 성장을 돕는 데에서도 실패하였다(그래서 ‘교육적 위기’도 초래하였다).



해방이후 특히 1980년대 이래로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교육을 바로 잡기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교육개혁을 단행하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개혁은 단골 메뉴로 등장하였고, 대통령 직속의 다양한 교육 관련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제안된 교육개혁 방안들은 한편으로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로 현실과 유리된 장밋빛 전망만을 제시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이해관계 등에 얽혀 학교교육의 본질이나 맥락에 대한 깊이 있고 체계적인 분석과 통찰을 결여한 채 정치적인 정책 방안으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육 개혁 방안들은 우리 학교교육을 바로 잡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학교교육을 망가뜨리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학교붕괴’ 혹은 ‘교실붕괴’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오늘날 우리 학교교육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학교교육의 문제 특히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서로 대립하는 극단적인 의견을 절충하여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 모든 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동일한 지붕 아래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여 민주화의 가치를 추구하되, 학생의 능력을 고려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과정이나 수업 관련 정책 대안을 마련하여 교육 가치를 추구하는 방안이 있다.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도 고등학교 교육의 형태를 놓고 많이 고민하고 논란을 벌인 끝에 종합학교(comprehensive high school)라는 평준화 학교체제를 만들게 되었고, 당시 선진국이었던 영국이나 독일의 1류/2류/3류 학교로 위계화된 고등학교 체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식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학교의 민주적 기제로서의 성격을 존중하여 학교 간에는 평준화를 유지하되, 학생의 성장을 돕는 교육 활동의 개인적 성격을 존중하여 학교 내에서는 수준별 교육/수업을 실시하는 방안이었다.



 이런 제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수준별 수업/교육을 실시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학교교육의 문제/위기가 여태껏 지속되거나 개선되지 않고 있는가? 수준별 수업/교육이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학력차이는 날로 벌어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학년별로 동일한 내용을 가르치도록 국가 교육과정이 엄존한 상태에서 교사가 교실에서 수준별 수업을 하라는 식의 형식적인 수준별 수업/교육, 수업은 수준별로 하라면서 평가는 동일하게 할 수 밖에 없도록 규제하는 정책들 간의 부조화 문제 등이 있다. 학생들 간에 실재하는 학력차이에 적합한 수준별 교육/수업을 실시할 수 있도록 국가 교육과정을 개정하고, 이에 적합한 평가 등의 지원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학교의 사회적 평등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수준별 교육/수업도 평등 정신에 위배된다고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학생의 개인적 성장을 도와주는 교육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수준별 수업/교육 정책이 실패했으니 평준화 정책은 이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이들은 극단적인 주장만을 내세우면서 절충이나 타협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학교교육은 태생적으로 절충과 타협의 산물이다. 학교라는 사회적 기관에 막대한 정부 예산을 투입하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사회적 평등 가치도 추구해야 하면서 동시에 각 개인의 지적, 전인적 성장을 돕는 교육 가치 또한 추구해야 한다. 즉 학교교육은 사회적 평등 가치와 개인적 성장 가치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양쪽의 가치를 모두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각 가치 추구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제약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평준화 고등학교에서 수준별 수업을 실시하는 방안은 이런 절충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형태의 수준별 수업이 아니라 조금 더 개선된 형태의 수준별 수업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고등학교 교육 정책은 수준별 수업을 실시하는 평준화 고등학교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을 평준화 정책에 추가로 첨가할 필요가 있다. 첫째, 각 분야별로 1-2% 정도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영재교육은 예외로 한다는 점이다. 이런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현재의 외국어고는 숫자도 많을 뿐만 아니라 외국어 교육의 성격상 영재교육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마땅한다. 둘째, 우리 사회에서 평준화 정책의 핵심은 학생 선발이며, 이 때 학생 선발은 추첨 배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생의 의사를 묻지 않고 행하는 극단적인 방식의 추첨 선발 외에도 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방식의 추첨 선발도 가능하다. 예컨대, 학생들로 하여금 선호하는 학교를 지원하도록 한 후에 합격자를 추첨 배정하는 방식도 추첨 선발이라는 점에서 평준화 정책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 서울특별시 교육청이 2010학년도 고교 입시부터 적용할 고교선택제는 학생의 진학 희망학교를 선택하여 지원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에서 ‘고교선택제’임은 분명하지만, 최종적으로 추첨 배정에 의해 합격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평준화 정책에 속한다.



요컨대,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과 관련된 갈등이나 문제는 극소수의 영재교육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준화된 고등학교에서 수준별 수업을 실시하는 방향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수준별 수업을 어떤 형태로 실시할 것인가 그리고 평준화 정책에서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어느 정도로 허용할 것인가는 논의의 맥락에 적합하게 검토 및 결정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학교교육의 사회적 평등 가치와 개인적 성장 가치를 동시에 추구할 때, 양쪽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데서 오는 약간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가 만날 수 있는 절충지대가 창출 될 수 있다. 이러한 절충지대 즉 중간지대에서 우리는 학교교육의 민주적 위기와 교육적 위기를 동시에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약력>


전 경실련 교육개혁위원
현 경실련 상집위원회 교육개혁위원장
   영남대학교 교수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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