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과의 20년 인연을 돌아보며

관리자
발행일 2009.11.24. 조회수 350
칼럼

 


경실련과의 20년 인연을 돌아보며



신현호(경실련 보건의료위원회)



법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 우리사회가 심한 성장통을 겪을 때 시위에도 참여하였지만, 사법시험공부를 시작하면서 한발 뒤로 물러서 있게 되었다. 같이 다니던 동료들이 퇴학과 구속을 당하고, 직업도 없이 지내는 것에 빚을 진 느낌을 받는 것은 그때를 살았던 모두에게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1990년 변호사로 첫발을 디딜 때 어떻게든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변호사모임과 시민단체를 찾았다. 그런데 적지 않은 단체들이 집행부의 일방적 의사결정이나 상근자중심으로 움직였고, 또는 이념적으로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망설이게 되었다. 그 때 경실련 시민입법위원장을 맡고 계시던 김일수교수님이 시민입법위원으로 일을 해달라고 부탁해 경실련활동을 하게 되었다. 대학시절 사회운동이 현실의 이익을 쫒는 정치세력과 이상을 추구하는 학생운동으로 양분되어, 중립적인 운동주체가 필요하다는 어렴풋한 생각을 가졌었는데, 경실련이 바로 그런 중립적 이념성을 가진 것은 물론 전문가중심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후 경실련이 주도한 의약분업이 의료계와 약업계의 심한 갈등으로 정치권이 눈치를 보는 상황이 벌어질 때 보건의료위원회에 의약분업제도에 대한 이론제공을 하다가 보건의료위원회로 옮겨 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의료소송을 전문적으로 시작하였고, 대학에서 의료법을 전공하고 강의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경실련 상근자들이 도움을 청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경실련이 의약분업을 이끌어 낸 일이 잘한 것이냐에 여러 의견이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경실련 밖에는 할 수없는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발전한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료와 같은 전문단체는 전문성, 밀실성, 정보편중성, 집단이기성으로 인하여 환자가 어떤 치료를 받는지 알 수 없게 유지․발전되어 왔다. 더욱이 조선말기 서양의학과 약학제도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오면서 진료를 전문하여야 할 의사가 조제도 하고, 조제전문가인 약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처방을 하는 의약일원화제도가 잘못된 관행으로 고착되면서 많은 약화사고가 발생하여도 그 원인을 모르고 지나갔다. 전문가는 스스로 자신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이를 강제하게 될 경우 심한 저항이 있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런 저항을 극복하고 의약분업을 이루어 내 환자들의 알권리를 확보하고 진료정보 내지 처방정보를 공개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경실련의 순수성과 전문성 때문이다. 만약 이해관계가 있었거나 전문성이 부족하였다면 공격을 받고 무너졌을 것이다.


 


의약분업으로 의료수가가 급상승하여, 건강보험의 재정이 취약해지자 정부는 2001년 5년 한시법으로 국민건강보험재정건전화특별법을 만들어 국민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구성운영하게 되었다. 경실련이 이 위원회의 가입자 대표 8명 중 한 단체로 들어갈 때, 건정심위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공익대표 8인, 가입자측 8인, 의료공급자측 8명 등 24명이 모여 매년 국민들이 내야하는 건강보험료를 결정하는데 건강보험의 재정건전화와 보장성 강화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수 십 조원씩 움직이는 건강보험사업에 경실련과 같은 전문성과 조직력을 가진 단체로부터 더 많은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2006년 의료법 개정 작업 시 의료행위의 범위에 투약을 넣을 것인가에 대해 의협과 대한약사회가 논란을 벌일 때였다. 방송에서 투약도 치료행위의 하나라고  인터뷰하자 즉각적인 반응들이 돌아왔다. 약사회장이 전화를 걸어와 “투약이 약사의 권한인데 왜 그런 말을 하였느냐?”고 항의를 했다. 대한의협회장이 대한약사회장에게 “경실련 대표도 투약이 치료행위이므로 넣는 것을 찬성하였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반향들을 보며 그 때 새삼 느낀 것은  경실련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다.


 


보건의료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보건의료관련법안을 구체적으로 입안하여 청원하였고, 일반약의 슈퍼판매(OTC)운동을 주도하였다. 의약분업시에는 의사들로부터 약사들 편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 그런가하면 OTC운동에서는 약사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건강에 치명적인 술과 담배는 전국 어디서나 어느 장소에서나 쉽게 살 수 있는 반면,  응급상비약으로서 부작용이 크지 않은 소화제, 설사약, 해열제 등은 약국에서만 구입하여야 한다는 것은 넌센스 임에 틀림없다.


 


국회에 경실련안으로 2005년 의료사고피해구제법(소개의원 박재완)과 2009년 존엄사법(소개의원 주성영)을 만들어 입법청원하였다. 의료소송을 진행하면서 실무에서 느낀 환자측의 입증부담을 해소하고, 무기대등의 원칙에 충실하도록 법안을 만들었다. 또, 2008년 서울서부지법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을 허용하는 첫 판결이 선고된 것을 계기로 2009년 우리현실에 맞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대상, 요건, 절차,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입안하여 제출하였다. 존엄사법이 생명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많이 있지만 이 법안은 오히려 말기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권과 생명권을 보장하는 법안이다.


 


최근 의료업의 영리화와 민간의료보험 도입 반대운동도 하고 있다. 이는 의료의 공공성을 무너뜨리고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를 방해하여 치료받을 권리를 침해 할 개연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의료에 관심이 있는 법인과 보험회사, 정치인, 언론 등의 집요한 요구와 외국인환자유치업의 허용 등이 국책사업화 되고 있어 영리화가 허용될 것이 우려가 된다.  


 


시민사회운동이 성공하려면 참여자와 후원자가 많아야 한다. 세브란스 존엄사 사건이 일본에도 알려져 2009. 3. 일본존엄사협회에 초청을 받게 되었는데 그 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지역단위의 작은 NGO는 많지만 우리와 같은 전국적인 NGO는 별로 없다고 들었었다. 하지만, 일본존엄사협회는 미국의 카렌퀴란사건을 계기로 1976년 전국조직으로 창립된 이래 회원수가 1990년 만명, 2002년 10만명, 2009년 12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 숫자는 연회비 2천엔을 내는 회원만 카운트한 것이다..게다가 일본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인 오쿠타 일본전경련회장, 우시오전기회장 등이 고문을 맡아 후원하고 있다. 최소한의 운영자금도 마련하기 어려운 우리 현실과 비교하면서 부러웠으나, 한편으로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시민사회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경실련 상근자들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시민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면서 우리가 열심히 할수록 다가와 지지할 것이고, 그러면 경실련 회원 수가 일본존엄사협회 회원 12만명을 넘어서 더 큰 성장의 값진 기록들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약력>
전 경실련 보건의료위원장
현 경실련 상임집행위원
   변호사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첨부파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