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경제정책의 변천2 : 자유방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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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11.04. 조회수 2567
칼럼






지난 칼럼에서 보았던 중상주의 다음으로 등장한 경제정책이 자유방임주의였다. 자유방임주의는 곧 경제적 자유주의이며 고전적 자유주의의 경제사상이었다. 19세기 유럽은 대체로 자유방임주의의 시대였다. 역사상 현실에서 정부의 경제규제가 전연 없는 완전한 자유방임주의가 실제로 채택되었던 것은 19세기 중반 약 한 세대 정도의 영국뿐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항상, 영국에서도 이 시절을 제외하고는, 보호무역정책을 중심으로 정부의 경제규제가 존재하였었다. 19세기도 그러하였다. 그럼에도 19세기를 자유방임주의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방임주의가 당시 서양의 시대정신으로서 올바른 정책원리라고 널리 인정받았으며, 이 시기에 정부의 경제규제가 그 이전보다 훨씬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본 바와 같이, 중상주의의 경제개입정책은 대상공인들에게는 유리하고 중소상공인들에게는 불리하였기 때문에 중소상공인들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지원을 모두 철폐하자는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을 주장하게 되었다.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고전적 경제적 자유주의를 최초로 명확히 제시한 것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이다. 이 책은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두 기둥인 자유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도가 왜 좋은지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하였다. 시장경제에서는, 누구나 자신을 위하여 장사하므로 자기중심적이라는 인간의 본성이 발휘되며, 경쟁의 효율성이 작동되며, 분업에 인한 기술발전이 실현되며, 자발적인 시장거래로 거래 쌍방 모두가 이익을 얻으며, 시장가격의 변동에 의해서 수요자와 공급자가 합리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아는 당사자가 생산의 주체가 되며,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가 배제된다는 여러 가지 큰 장점들이 있음을 그는 지적하였다.



스미스는 또한 사유재산제도가 경제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보았다.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어서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재산을 자신이 확실하게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다시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그가 말한 사유재산의 보호는, 다른 민간인들로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국가권력자인 왕과 그 부하들로부터의 보호였다는 것이다. 이를 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제 몰락과 영국의 경제발전을 대조하여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중남미의 광대한 식민지 덕분에 16세기 유럽 제일의 부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그 이후 점차 경제적으로 쇠퇴한 것은, 법치주의가 확립되지 않아서 왕과 그 부하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는 바람에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16세기에 이들보다 훨씬 가난하였던 영국이 이들 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더 부유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육군으로 구성되는 왕의 상비군이 적었으며, 그 덕분에 왕과 그 부하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상공업이 발달할 수 있게 된 덕분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를 매우 중시하여 <법학강의록>과 <국부론>에서 모두 강조하였다.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한 법치주의와 사유재산제도의 핵심은 이처럼 국가권력자의 횡포를 막는 데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주로 침해하는 자유의 주된 적(敵)은 국가권력자라는 것은 스미스만이 아니라 로크(John Locke)와 밀(J.S. Mill) 등 자유주의자들의 일관된 강조점이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강자뿐인데 과거나 지금이나 주된 사회적 강자는 국가권력자이므로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횡포를 막는 공정한 법이 필수적이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하나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무런 규칙도 없는 무법천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공정한 법질서 안에서의 자유를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운동경기에서 규칙이 없으면 경기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의 자유거래에도 공정한 규칙들이 필수적이다. 민법, 상법, 금융법 등 근대적인 경제법들은 모두 시장경제에서의 공정한 자유거래를 보장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등장하였다. 자유방임주의는 공정한 규칙만 남기고 정부의 경제개입은 철폐하자는 주장이다. 로크의 말대로 "법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도 정의의 법(공정한 규칙)을 준수하는 범위 안에서의 자유이다. 달리기 시합에서 다른 선수의 발을 거는 반칙은 법으로 막아야 함을 그는 강조하였다. 그는 정의의 법을 지키지 않는 이기심(selfishness)과 정의의 법을 준수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애(自愛, self-love)를 구분하고, 자애만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된다고 보았다. 흔히 스미스가 이기심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보았다고 말하지만, 그는 긍정적인 의미로는 이기심이란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고 탐욕과 같은 의미로만 이기심이라는 말을 썼다. 그는 긍정적인 의미로는 자애나 자기이익(self-interest)이란 말만 썼다.



"특혜를 주거나 제한을 가하는 모든 제도가 완전히 철폐되면 분명하고 단순한 자연적 자유의 체계가 스스로 확립된다. 이 체계하에서 모든 사람은 정의의 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자신의 근면과 자본을 바탕으로 다른 누구와도 다른 어느 종류의 사람과도 완전히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다." 스미스의 말이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와 관련하여 두 번째로 명심할 것은 그가 지지하였던 것은 자유로운 경쟁시장이지 자유로운 독과점시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점에는 시장에서 자본의 집중과 집적으로 형성되는 경제적 독점과 정부가 독점권을 부여하여 형성된 법적 독점의 두 가지가 있다. 스미스 당시에 경제적 독과점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번 칼럼에서 본 것처럼 중상주의에서는 정경유착하에서 정부의 독점권 부여로 때문에 형성된 법적 독과점이 존재하였다. 독과점은 기업에 폭리를 주고 소비자에게 피해를 준다고 스미스는 독과점을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오늘날 대부분 시장은 독과점시장이다. 만일 스미스가 오늘 살았다면 독과점 규제를 지지하였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하여 지극히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자유방임주의는 스미스만이 아니라 18세기 후반 영국 지식인 사회의 주류였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글라스고우와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유럽과 북미를 대상으로 무역이 발달하여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들 중소상공업자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였고 스미스와 흄(David Hume, 1711-76)이 그 대표였다. 스미스는 그의 12년 선배였던 흄과 직접 교류하며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새로운 사회주도계급으로 등장하던 이들 중소상공인들에게, 자신들에게 부와 권세를 잡을 기회를 주는 자본주의사회는 좋은 세상이었으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자연조화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으며,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의 보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각자 개인 혼자의 힘과 책임으로 상공업을 경영하여 살아가는 이들에게 개인주의는 비난이 아니라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의회중상주의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륙의 왕실중상주의보다 규제가 훨씬 덜한 편이었지만, 노동자의 거주이전을 제한하는 구빈법, 임금규제, 수출입규제, 자국의 무역 상품 운송은 영국 선박만을 이용하도록 강제하는 '항해법', 동업자조합의 규제 등과 같은 중상주의적 규제들은 아직 남아 있었으며, 이런 정부규제를 비판하는 자유방임주의가 중소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정도로 당시 영국 사회의 공감을 얻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판되어 명쾌한 논리로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자 영국 사회로부터 즉각 큰 지지를 얻어서 영국은 남아 있던 중상주의적 규제들을 점차 완화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중엽에는 모든 규제를 완전히 철폐하여 완전한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영국의 자유방임주의는 다른 구미국가들에게도 점차 전파되어 대체로 19세기 서양은 자유방임의 시대였다.



19세기 자유방임주의는 두 가지를 계기로 19세기 말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나는 1873년부터 1896년까지 20년 넘게 세계를 강타한 최초의 세계적 '대불황'이고 또 하나는 무산자계층의 빈곤이었다. 자본주의의 한 특징인 불황은 19세기 초부터 약 10년을 계기로 주기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불황은 회를 거듭할수록 정도가 심하여져서 1873년에 시작된 대불황은 20년이 넘는 오랫동안 전 세계 경제를 침체기에 빠뜨렸다. 지금은 1930년대의 대공황에 묻혀서 잊혔지만 이 대불황 기간 세계의 도매물가 지수는 약 60% 수준으로까지 하락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어서 '대불황(the Great Depression)'이라고 불린다.



이 세계적 대불황은 독과점화와 제국주의라는 두 가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불황에서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도산하고 대기업만이 살아남아 독과점화가 강화되었으며 그 결과로 독점자본주의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또한 각국 정부는 국내불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무력을 이용한 식민지 개척을 강화하여 제국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 제국주의 경쟁의 결과였다.



자유방임주의의 막을 내리게 한 또 하나의 계기는 무산자계층의 비참한 빈곤이었다. 스미스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면 모두가 생업을 얻어 잘살게 될 것이라고 보았으나, 산업혁명 이후 경제발전의 혜택은 부르주아들에게만 돌아가고 인구 대다수를 점하던 무산자계층인 노동자들은 턱없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빈번한 실업 탓에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를 해결하고자 등장한 것이 사회주의와 다음 칼럼에서 볼 사회적 자유주의이다.

 

 



/이근식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메일보내기



 



※ 이 글은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2011년 11월 0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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