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윤석열 정부의 공교육 경쟁력 강화 대책과 공교육 정상화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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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07.28. 조회수 41429
칼럼

[월간경실련 2023년 7,8월호][특집.킬러문항과 사교육(2)]

윤석열 정부의 공교육 경쟁력 강화 대책과
공교육 정상화 방안


이형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


문제의 원인

교육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오래된 논란거리 중의 하나이다. 학생부터 어른까지, 성적순으로 이름 모를 지방의 대학생뿐만 아니라 서울대생까지 누구도 현재 교육체제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그 원인에 대해 의견은 분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원인 하나만을 꼬집을 수는 없으나 대체로 동의하는 것 중 하나는 사회 전반적으로 학력을 한 인간이 가진 능력 전부로 동일시하고, 교육이 본래의 목적보다 신분 상승 욕구 수단으로 전락하여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비상식적인 방향으로 집단 동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개선이 필요하기는 하나, 서열화라는 경쟁 기제가 만들어낸 상황의 결과물이다. 학생들이 배우려는 의지가 없어서, 교사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1점이라도 더 얻으려는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 왜곡되었다는 이유로, 개인들의 태도나 성향을 개조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교육부와 국가도, 성향의 차이는 있었지만,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별다른 대안이 없기에 모험을 감수하지도 않았다. 동시에 경쟁이라는 제도와 정책은 완강한 자기 구조를 형성해 왔다. 심지어 윤석열 정부는 국가가 나서서 경쟁 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다. 얼핏 공정해 보인다는 이유로 적잖은 사람이 동조하고 있다.


공정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차별

정확한 수치로 계량화하면 논란으로부터 자유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측정 도구의 공정성이 교육의 가치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 만일 100미터 기록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고 평가한다면 공정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말은 학력이지만 특히 점수 결과로 표시되는 성적은 한 인간이 가진 여러 능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성적 하나로 전국의 학생들을 줄 세운다는 것은 달리 보면 공정이 아니라 차별이다.


성적 지상주의는 사회적 학대에 가깝다. 그것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자식과 부모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 달리기가 느리거나 노래를 못한다고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들은 없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부모의 눈치를 보는 학생들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어, 영어, 수학 점수가 낮으면 부모도 학생도 불안을 직감한다.


정부의 공교육 경쟁력 대책, 간판과 다른 사교육 양성 대책

교육부는 지난 6월 21일, 공교육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하였다. 해당 보도 자료에서 교육부는 학교가 “여전히 ‘지식 전달 위주’, ‘평균 수준’의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이 수업에 흥미를 잃고, 사교육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등 공교육의 질은 전반적으로 하락했다”라고 진단했다. 공교육 질 저하의 책임을 학교와 교사들에게 떠넘겼다. 교육을 ‘가르치는 행위’나 ‘성적 올리는 일’ 정도로만 편협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교육부의 기조는 초3, 중1을 책임교육 학년으로 지정하고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 평가를 실시한다는 부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우선, 과목별 2~30개 문항의 시험지로 학생의 학력을 진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며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력을 진단하는 것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단순 구별하여 가르쳐주는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학습하기까지 가정-사회-학교-관계-정서 등 학습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를 찾아내는 전인적 과정이다. 학생 개개인의 처지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이에 반응하여 학교 구성원이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도록, 학교에 무엇이 필요한지 지원사항을 찾아내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책임은 지원 단위로서 시·도 교육청과 교육부에 있다.


애초 학생들의 ‘진단평가’는 공교육을 책임진 국가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과 평가’를 점검하기 위한 참고 자료가 되어야 하며 이는 전수조사가 아닌 표본조사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시 말하면 ‘학생성취도 진단평가’는 교육부가 자신을 평가하는 도구여야 한다. 그러나 이주호 장관은 거꾸로 진단평가를 통해 학생들을 평가하고, 그 평가자료로 학교 교육과정을 뒤흔들겠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진 노골적으로 성적을 강조하는 정책이 성적 격차를 오히려 조장한다는 사실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덧붙이자면 이미 진단은 교실에서 일 년 내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개별 맞춤형 교육활동이 일어날 만한 충분한 지원이 없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공교육 정상화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자사고·외고·국제고 존치’ 방침이다. 성적에 따라 학교가 다양하게 분류되는 ‘서열화’를 ‘다양한 교육’, ‘학부모의 선택권’이라고 우기며,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을 ‘획일적 평등 교육’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수능이 점수로 줄 세우는 도구로 전락하고 의대 쏠림 현상이 지배하는 현재 상황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맞춤형 입시학원에 불과하다. 말은 ‘다양화’지만 교육과정은 ‘획일화’다.


자사고·외고·국제고의 존치는 일반 학교의 내신 성적을 무력화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노골적으로 일반 학교의 1등급보다 자사고·외고·국제고의 2, 3등급을 더 신뢰한다는 말이 그냥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학생부종합전형’이나 ‘교과 전형’
과 같은 수시전형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선택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며 수능시험 점수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여 사교육 양성에 노골적으로 기여한다.


고교학점제 또한 2025년부터 전면화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그렇지만 고1 공통과목은 9등급제 상대평가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는 학생들의 다양한 적성과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고교학점제의 취지와 또 어긋나는 발표다. 고교학점제의 온전한 정착을 위해서는 모든 과목에 성취평가제(A~E단계)를 적용한 절대평가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변화된 고교교육과정에 걸맞는 대입 선발 방식을 지금부터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교육부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수능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어두고 있는 꼴이다.


교육부는 또한 지난 6월 26일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하였다. 교육부가 말하는 ‘공교육 경쟁력’은 한 마디로 사교육 수요를 학교에서 흡수하라는 말이다. 이를 ‘교과 보충 강화’, ‘돌봄 및 체육·예술 등 수요 흡수’라는 추진과제를 통해 노골적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사교육 문제 중 ‘과도한 지출’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사회적 학대’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성장기 학생들의 과도한 학습 시간에 대해 가정과 사회가 묵인하고 있으며 국가는 정책으로 이를 조장하고 있다. 교육부의 보도 자료는 다양한 표현을 나열하긴 했지만, 대한민국의 아동·청소년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어른들이 설계한 대로, 쉼 없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배움을 주입 당하는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대를 포장하고 있다.


학벌사회 해체

교육이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학벌사회가 해체되어야 한다. 성적으로 드러나는 학력을 능력 전부로 보고 모든 분야에 과도하게 적용하는 현상이다. 이를 그대로 방치할 때 어떤 대책도 사교육의 욕망을 잠재울 수 없다.


우리나라는 학벌(주의)사회이다. 곧,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가 인생을 좌우하고 일류대 합격 여부가 남은 인생의 보상과 대우를 결정한다. 과외 망국론이 등장했던 1980년 정부가 추산한 초·중·고생 사교육 참여율이 6%였는데, 2022년 사교육 참여율이 78.3%로 뛴 데서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2022 한국의 사회지표’(통계청. 2023.3.23.)에 따르면, 2021년 대졸을 100으로 한 교육 수준별 임금수준은 중졸 이하 48.9, 고졸 64.4, 전문대졸 78.2, 대학원졸 145.5 수준이다. 대졸 임금은 고졸 임금의 약 1.6배이며, 대학원 졸업자 임금은 고졸 임금의 약 2.3배, 대졸 임금의 약 1.5배에 달한다. 대졸 사이의 격차도 크다. 대학 서열이 생애 임금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148개 대학의 학생을 5분위로 나누어 서열화해 분류한 결과 상위 20% 학생은 하위 20% 학생보다 노동시장 진입 때 14% 높은 임금을 받기 시작해 40~44세가 되면 46.5% 높은 임금을 받아 격차가 벌어졌다(이지영·고영선, 「대학 서열과 생애임금 격차」, 한국노동연구원, 2019.). 능력이 아니라 학벌이 격차를 결정한 것이다.


앞서 말한 학벌에 의한 임금 격차는 땀 흘려 일하는 노동 경시 풍조를 양산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노동 경시 풍조는 학생들에게 지역을 떠나 도시형 소비자로 살아가도록 부추겼다. 이는 지방소멸을 가속한 주범이기도 하다. 학교를 포함한 교육 기관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적으로 잘 가르쳐서 교육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과 별개로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한 성찰이 필요하다.


미래 사회를 위한 교육의 역할

먼저, 교육의 목표가 ‘잘 가르치는 일’을 넘어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로 확장되어야 한다. 교육을 가르치는 행위로 협소하게 생각할수록 전문성이라는 명분으로 교사만이 해낼 수 있는 일로 여겨지고, 이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요구가 학교 안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은 학교의 역할도 있지만, 시민적 권리로서 국가와 지역사회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래야 학교로 집중되는 과중한 역할을 지역사회와 나눠 가질 수 있다.


학교 또한 학생들을 다양하게 연결하고 확장해주는 플랫폼과 같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교과 활동의 틀만으로 성장을 담보할 수는 없다. OECD나 UNESCO에서 제안하는 미래교육의 지향 또한 실제 삶과의 연결이다. 학교만의 노력이나 헌신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지역사회 협력과 거버넌스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이다. 이는 학교 자치와 교육자치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학교가 지역사회로부터 고립될수록 문제해결은 더디어질 수밖에 없다. 협력 없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나 인간상 또한 ‘공감’을 중시해야 한다. 국제적으로도 미래 교육의 요소 중 학습자 주체성과 변혁적 역량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능력을, ‘고립된 상태에서 발휘하는 특정 기능’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관계와 맥락 안에서 구체적인 역할로 기여하는 행위로 본다는 것이다. 서민들의 처지와 여건을 모르는 정치인이 제아무리 명문대를 졸업해도 유능하다고 볼 수 없듯이, 타인의 처지와 여건에 반응할 수 있는 능동적인 역할을 능력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의 사회· 정서적 측면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교육활동은 학생들의 ‘자발적 선택과 활동 기회’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사회적 무기력은 또 하나의 위협요인이다. 그 원인은 개인들의 성향뿐만 아니라 지속해서 선택의 기회가 박탈당할 때 나타나는 ‘욕구 부재’ 현상이다. 학생들에게도, 성인들도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확장될 때 사회는 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활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위 글의 내용은 개인의 의견으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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