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포커스]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사회공동체 회복의 길

회원미디어팀
발행일 2024.04.01. 조회수 25598
칼럼

[월간경실련 2024년 3,4월호][시사포커스(3)]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사회공동체 회복의 길

김경민 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 처장

 

 안산경실련 사무국장 재직 시절이었던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 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하필 나는 독감으로 정신이 혼미했던 상태였는데 당시 TV방송으로 나왔던 세월호 침몰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 뉴스를 보았던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 기억을 한동안 안고 살았을 것이다. 안산은 한 다리만 건너면 직간접적으로 아는 희생자(당시 실종자)가 있는 터라 충격이 컸고, 안산시민들은 참사 당일부터 단원고에 모여 실종자 귀환을 기원하는 촛불모임을 시작했다. 이후 안산시민사회단체들은 시민대책위를 꾸려 진상규명 촉구활동을 시작했다.

 피해자들과 국민의 처절한 요구 속에서 어렵사리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대한 국회 합의가 이뤄졌고, 참사의 진상규명은 법에 의해 국가가 시행하는 방향이 결정되어가던 시기인 2014년 말경 안산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지역 회복의 의제를 고민하였다. 그 결과 ‘안산시민 1,000인 대토론회’를 2015년 2월에 개최했다. 토론회에는 학생, 주부, 노동자, 공무원, 자영업자, 기업인, 전문직 종사자, 시민사회단체, 참사 피해자 등 875명의 안산시민이 참가했으며, 참가자들은 4·16참사 이후 가장 힘든 점, 세월호참사가 심리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회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등을 논의했다. 당시 대토론회에서 나왔던 진상규명, 마을공동체회복 등의 의제들은 이후 2015년 10월에 2차 토론회를 통해 시민 실천과제를 도출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나는 안산시민대책위의 대외협력담당으로 주로 언론대응과 성명서 발표의 업무를 담당했고, 안산시민 대토론회 준비위원회의 실무총괄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참사 발생 지역이 아님에도 다수 희생자를 안게 된 안산지역의 피해회복을 고민했고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피해지원점검과 조사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기 특조위는 정부 방해로 운영에 제동이 걸려 불안정했던데다 당시에는 피해자 지원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점검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피해지역 회복의 문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결국 조사를 마치지 못하고 2016년 6월 정부의 1기 특조위 강제해산 조치가 이뤄졌다. 자괴감에 힘들었으나 다행히 이후에 관련 위원회들이 생기고 조사를 지속할 수 있어 선체조사위원회에서의 인양점검보고서, 사회적참사특조위의 세월호피해지원보고서를 남길 수 있었다.

 세월호참사로 304명이 안타깝게 희생됐고 가까스로 살아나온 피해자는 선원을 제외하고 157명이었다. 희생자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가족, 참사의 고통이 반복되는 생존자와 같이 견뎌야 하는 가족, 다수 희생자 모습을 보고 직접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민간 잠수사와 구조를 도운 진도 어민 등 구조·수색 인력, 가족들 구호를 담당했던 많은 자원봉사자, 참사로 인해 화물손해와 어업 손실을 보았던 생존자와 어업인들, 피해자 대다수가 거주했던 안산지역과 사고 발생지인 진도 지역의 주민들도 참사의 피해를 본 이들이다. 또 참사 이후 희생자와 피해자를 향했던 각종 불법사찰과 혐오표현들은 2차 피해를 발생시켰다. 희생자에게 가해진 반윤리적 표현들은 도를 넘었고, 참사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려 하거나 참사 피해 배·보상금을 특혜처럼 표현하는 것은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기도 했다. 세월호참사로 인한 피해 범위는 명확히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파악된 사례만으로도 피해 범위가 매우 넓다. 모든 참사의 피해는 이렇듯 넓고 깊고 심하다.

 세월호참사는 대규모 해양 선박사고면서 사회재난으로, 수색구조·현장수습·사후대책의 정부 통합대응이 절실했다. 또 해상에서 생존자 구조 및 희생자 수습을 한 이후 육상으로 인계, 사상자 인계 후 생존자 귀가 또는 희생자의 장례지원까지 지원조치 전반에 관계기관의 실시간 협력이 필수요소였다. 사상자들은 다수 그룹과 소수그룹 및 개인 등으로 다양하게 분포했고 거주지역도 달랐으나 이를 고려하지 않아 피해지원이 일사불란하지 못했다. 다수가 미성년자라서 신원확인에 혼란도 있었고 미취학 아동도 있어 교육기관 등 관계 기관들의 특별한 조치도 필요했다. 정부는 승선자를 구조하지 못했으면서 가족들에게 정보를 왜곡하여 불신을 가중시켰고, 이후 피해자들의 요구에는 감시와 사찰로 대응하며 일관되게 참사의 책임을 회피했다. 일부 정치인과 보수단체들, 언론매체들의 가세로 참사 피해자들은 고립되었다. 우리 사회와 정부는 피해자 권리나 피해범위 등에 이해가 없었고 진상규명, 배·보상, 추모 과정의 권리침해가 발생했으며 법률지원, 자원 민간인력의 후속지원, 재난 피해지역과 주민 지원 등은 미진했다. 구조로부터 시작되는 피해지원의 모든 과정에서 참사의 피해자들은 인권과 정의, 사회변화를 요구하며 노숙과 단식을 반복해야 했다. 희생자들의 소중한 인명, 많은 이들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게 되었다.

 세월호참사 이후 재난 피해지원에 대한 인식과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공급자 중심의 시혜적 재난피해지원을 국가의 책무이자 피해자의 권리로 인식하는 흐름이 나타났고 제4차 국가안전관리기본계획(2020~2024)에는 재난 피해지원을 사람·인권·피해자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점이 명시되기도 했다. 참사 피해지원과 관련한 다양한 정부 매뉴얼 개정도 이뤄졌다. 그러나 여전히 참사 피해지원의 영역이 배·보상이나 심리지원 정도로 국한되는 인식의 한계가 있으며, 재난안전법이나 재해구호법 등에는 ‘피해지원’이나 ‘피해자’ 개념이 없고, 특별법을 제정하여 그때그때 적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별법 제정은 늘 험난하고 그조차 엄두도 못 내는 사건도 많다. 당연히 국가가 선행해야 하는 진상규명을 이태원참사 피해자들이 요구해야 하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만 재난·참사는 앞으로도 다양하게 발생할 것이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참사 피해의 원상회복은 어렵지만, 피해자들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고 권리가 보장되며 사회공동체가 붕괴되지 않게 우리는 참사의 교훈을 잘 기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모두가 스스로를 위해서. 세월호참사 이후 10년을 지나온 지금, 많은 재난과 참사로 희생되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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