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인터뷰] 월간경실련을 만든 사람들

회원미디어팀
발행일 2024-07-29 조회수 36872
스토리

[월간경실련 2024년 7,8월호][특집.월간경실련 200번째 이야기(3)]

“경제정의가 이뤄지는 그 날까지”

- 월간경실련을 만든 사람들, 위정희·노정화·양세훈 -

문규경 회원미디어팀 간사

 월간경실련이 200호를 맞았습니다. 오늘의 월간경실련이 있기까지 회원님의 아낌없는 사랑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월간경실련을 만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시민운동 종합정론지의 자부심을 지키고자 노력한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경실련”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지금도 심장이 뛴다는 위정희(前 기획실장), 노정화(前 회원홍보팀 팀장), 양세훈(前 월간경실련 기자) 세 명의 전직 경실련 활동가와 함께 월간경실련을 되돌아보았습니다. 

Q. 월간경실련 구독자님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십니까? 1991년 경실련에서 발행하던 잡지 ‘경제정의’ 기자로 활동을 시작한 前 기획실장 위정희입니다. 2011년까지 정책실, 조직국, 경불련(사)이웃을돕는사람들, 회원사업국, 시민참여국, 시민입법국, 기획실, 통일협회 등 경실련 내 다양한 활동을 20년 가까이 하였습니다. 경실련 사무국이 60여 명 가까운 활동가들로 북적이던 종로 5가 시절부터 정동 시절, 그리고 대학로 시절까지 경실련은 제게 ‘청춘을 함께한’ 활동의 장이었습니다. 경실련 활동 이후에도 ‘자유, 평등, 민주’의 경실련 기본가치가 제 개인적 비전의 근간입니다. 시민력 증진을 위한 시민공익활동 촉진의 과제와 특정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나눔’을 통한 시민교육을 수행하는 서울시 동남권NPO지원센터장, 나눔교육센터장의 역할이 더불어 함께 사는 공존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는 개인적 비전과 닿아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한 우리 사회 중요한 가치인 ‘일한만큼 대접받는’, ‘약자를 보호하는’,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한 정의 사회 구현을 목표로 활동하는 전문가 위원님들과 상근활동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묵묵히 후원과 애정을 보내주시는 회원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지면으로 인사드리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Q. 월간경실련이 200호 특집을 맞이했습니다! 예전에 담당을 하셨는데,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A. 월간경실련 200호 발행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 사회 현안을 기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유일무이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자부하셔도 좋습니다. 초창기 경실련이 발행하던 ‘경제정의’는 월간 발행은 아니었지만 두 달에 한 번 혹은 계간지 성격으로 ‘현안 분석 및 대안’을 자세하게 다루어 시민들 뿐만 아니라 학자, 정치인, 대학생 등에게 인기 있던 경실련 운동의 대변지, 나아가 한국 시민운동의 기록이자 대변지였습니다. 월간경실련이 우리 사회 현안을 제대로 짚어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꾸준히 수행하기를 바라면서 한국의 시민운동을 진단하고 발전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도 함께 수행하기를 바라봅니다. 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역할인 기업, 국가를 비롯한 권력 기반의 사회구조를 균형 있게 감시하는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Q. 월간경실련을 만드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을까요?

A. 기록이 남아있는지를 모르겠으나, 92년도 제14대 총선을 이틀 앞두고 ‘여당인 기호 1번을 선택하라’는 군 부재자 부정투표를 고발한 당시 중위였던 이지문씨의 경실련 사무실에서 열린 양심선언 기자회견(공선협 주최)부터 기자회견 후 바로 헌병에 끌려가 구속된 후 군사법정 현장까지 동행 취재했던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여당을 강요한 투표, 공개투표, 기표검열 등 부정한 선거 관행은 이후 군 부재자 투표 장소가 영외로 변경되는 등 군대 내 부정선거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들이 마련되는 변화를 만들어내었던 사건이었습니다.

Q. 월간경실련 구독자님들께 전하는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A. 배달되어오는 월간경실련을 꼼꼼히 읽어봅니다. 그 안에 우리 사회의 현재가 있고 대안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가 담겨있습니다. 이후 지방소멸, 저출생, 기후재난까지 경실련의 기본가치의 잣대가 더 필요한 의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구독자님들께서 월간경실련이 경실련만의 기록이 아닌 한국 사회 현상의 기록이며, 향후 대안을 모색하는 가늠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변치 않는 후원과 애정을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Q. 월간경실련 구독자님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전국의 경실련 회원님. 경실련 회원과 홍보를 담당했던 노정화입니다. 십여 년 만에 이렇게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특히 지역경실련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후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꼭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Q. 월간경실련이 200호 특집을 맞이했습니다! 예전에 담당을 하셨는데,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A. 200호 특집이 나오기까지 애써주신 모든 관계자분들께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전합니다! 제가 담당했을 땐 경실련치고는 조금은 가볍고 또 조금은 재밌는 내용으로 꾸미고자 했던 월간경실련인데, 200호 특집호를 발간한다니 그동안 애써주신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Q. 월간경실련을 만드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을까요?

A. 제가 회원과 월간경실련을 처음 담당했을 때, 딱딱하고 재미없던 기존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 했던 일들이 떠오르네요. 자원활동가와 함께 20년 후원하고 계신 회원님을  찾아가 인사드리며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낯선 이와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연륜이 되었습니다만, 당시 사회초년생인 제가 더 앳된 대학생 자원활동가와 함께 농담 한마디 없이 진지한 분위기로만 인터뷰를 했던 긴장감과 어색함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사무실 밖을 나와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또 월간경실련을 발송하는 날은 비용 절감을 위해 모든 상근자들이 강당에 모여 음악을 들으며 함께 봉투에 잡지를 넣고, 주소 라벨을 붙이고, 같은 우편번호끼리 노끈으로 묶어 우체국에 발송했었지요. 그러고는 강당에 모여 짜장면을 시켜 먹었답니다. 당시엔 시간이 아까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제 마음속 한편에 추억으로 자리 잡았네요.

Q. 월간경실련 구독자님들께 전하는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A. 제가 경실련 입사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기후 위기와 출산율 저하라는 생존의 이슈에 당면한 것을 보면서 '우리 정치·경제·사회는 좋아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중파 뉴스만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치미는 순간이 찾아 옵니다. 그래도 "촛불집회"와 "탄핵"이라는 지난 두 사건으로 스스로를 위로해봅니다. 아직 더 가야 할 길이 있지요? 저는 이제 아이들을 키우는 학부모로서 또 소비자로서, 유권자로서 나를 둘러싼 작은 환경에서도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과정이나 정보를 독점하는 사안과 끊임없이 마주합니다. 개성 강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부드럽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며 천천히 가는 것이 정답인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참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울림 없는 작은 목소리라도 내봅니다. 회원님들 또한 그러하시리라 믿어봅니다. 회원님 가정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며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Q. 월간경실련 구독자님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A. 20년 만에 월간경실련 지면을 통해 인사드립니다. 2002년 6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시민운동 종합정론지 월간경실련’을 담당했던 양세훈 기자입니다. 경실련이 경향신문 옆 피어선빌딩에 있을 때 입사했고 대학로로 신축 이전한 후에도 함께했습니다.

 입사 당시 월간경실련을 담당하시는 분이 있으셨지만, 한 달 만에 제게 인수인계 후 그만두셨어요. 당시만 해도 기자 경력이 미천했던 제가 홀로 2년 넘도록 월간경실련을 제작했습니다. 격월간으로 발행했지만, 각 부서장과 편집회의를 통해 그달의 주요 이슈를 점검하고 지면 계획을 짰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원고가 마감되면 편집실(외주)에서 디자이너와 꼬박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초보 시절이라 서툴렀지만, 제게는 큰 자양분이 되었던 시절입니다. 현재 저는 한스경제라는 중소 경제매체에서 ESG경제부 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Q. 월간경실련이 200호 특집을 맞이했습니다! 예전에 담당을 하셨는데,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A. 보통 “벌써 200호라니 축하합니다”라고 해야 맞지만, 30년이 넘는 경실련 역사에서 이제야 200호라는 말에 시민단체가 처한 상황을 말해주는 거 같아 마음 한편은 무겁습니다. 제작비가 부족한 탓이지만, 제가 근무하던 시절에도 ‘월간’경실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달 발행되길 희망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지금까지도 이끌어와 주심에 경실련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퇴사한 이유는 당시 제가 월간경실련 ‘기자’에서 정책실 ‘간사’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신임 사무총장께서는 월간경실련을 학술지 형태로 바꾼다는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약 3개월여간의 정책실 간사로 지내면서도 기자로서의 꿈을 이어가길 희망했기에 경실련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월간경실련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발행되고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대학생 기자단도 꾸리고 있으니 200호를 넘어 경실련이 필요 없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경제정의가 이뤄지는 그 날까지 발행되길 희망합니다.

Q. 월간경실련을 만드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을까요?

A. 매호 매호가 추억이고 소중합니다.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이 한창일 때 첫 출근했고 당시 미군 장갑차에 깔려 목숨을 잃은 중학생 효선이와 미순이를 추모하고 대책을 촉구하던 거리집회, 이라크전쟁 반대 집회 등 거리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한·칠레 FTA에 반대하며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신 이경해 농민운동가의 따님을 만나 당시 농촌의 현실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김근태 민주당 의원의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쌀집아저씨로 유명했던 MBC 김영희 PD 인터뷰를 통해서는 그가 국내 최초 자막 예능의 시대를 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만나는 모든 분이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셨고 진심을 담아 지신의 이야기를 들려주 셨습니다.

 특히 2002년 12월에 치러진 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서는 월간경실련 주최로 당시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 정몽준 후보 등을 초청해 토론회를 개최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월간경실련 이름으로 대통령 후보들의 정책 토론회를 개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경실련 위상이 어땠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경실련이 가장 열심히 했던 부동산 가격 폭등 문제가 지금도 여전한 사회문제라는 사실은 경실련이 앞으로도 더 분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Q. 월간경실련 구독자님들께 전하는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A. 월간경실련 마지막 페이지는 항상 신규 경실련 회원 명단이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중앙경실련과 지역경실련별로 신규 회원님의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배열하며 한분 한분의 이름을 살펴보곤 했습니다. 올려야 할 이름이 많을 때는 흐뭇했고 그렇지 못할 때는 분발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기도 했습니다.

 열악한 시민단체 환경에서도 경실련 실무자들이 힘을 낼 수 있는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회원님들의 후원과 응원 덕분입니다. 앞으로 월간경실련 구독자분들의 살림살이에 꽃이 피고 경실련 살림살이에도 꽃이 피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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