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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기-행] 이야기에 물든 다(茶), 강진

[월간경실련 5,6월호][윤서기-행] 이야기에 물든 다(茶), 강진 최윤석 회원    아파트 단지 안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언제 이렇게 피었나, 싶게 정원마다 색색의 꽃들이 만발했다. 하나 같이 강렬한 채도를 가진 단색의 꽃들이 한데 뭉쳐 세를 과시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사거리마다 진을 치고 있던 색색의 사람들이 떠오른다. 4년마다 돌아오는 땅따먹기가 일으킨 흙먼지가 채 가라앉지 않은 어느 날, 그 풍진 세상과 가장 멀리 있음직한 곳을 찾아 강진으로 떠났다.  강진은 한반도 최남단부에 위치한다.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형태이다. 북으로는 영암군과 면하고, 동서로 각각 장흥과 해남에 가로막혀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동서 중간을 ‘푹’ 파고들어 내륙 깊숙이까지 남해의 파랑을 전달해주는 강진만의 존재이다. 행정체계의 효율성만을 따지고 보면 강진의 존재는 어쩐지 어색하다. 그리 넓지도 않은 땅, 지도를 보면 차라리 강진만을 경계로 동서 각 권역이 장흥, 해남으로 합쳐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역사 이래 줄곧 독립적인 행정단위로 존속해 온 모종의 이유가 있었을 터, 다만 그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강진이 문자 그대로 바다를 ‘품고’ 있는 도시라는 것. 일종의 ‘패시브 스킬’처럼, 눅진한 바닷바람이 기천년간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정서를 구성하였을 것이다. 이어질 내용은 대개 산천에서의 시간에 대해서이다. 먼지 하나 없이 내처 푸르렀다. 그러나 그 산뜻해 보이는 대기 곳곳에도 섞여 있었겠지, 어떤 비애가. 아마 그건 바다의 일이었을 것이다. 다산초당ㆍ백련사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강진으로 유배된 뒤 10여 년을 지낸 곳이다. 가문이 풍비박산 났음은 물론이고 살아생전 자신의 귀향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는 생의 의지를 잃지 않고 이곳에서 수많은 통찰을 저서에 담아내 인류의 유산으로 남겼다. ‘초당(草堂)’이라는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본래 작은 초가(草家...

발행일 202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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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기-행] 피어난 섬진강

[월간경실련 3,4월호][윤서기-행] 피어난 섬진강 최윤석 회원    잎샘이 채 가시지 않은 3월 초순, 먼저 온 봄을 만나러 섬진강에 갔다. 얼마 안 가 전국 팔도를 들뜨게 할 수많은 꽃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곳으로. 불과 그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에는 대설이 내렸었다. 그런 와중에 봄꽃이 가당키나 한가? 헛걸음하는 건 아닐까? 미심쩍은 마음으로 호남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러나 기우였다. 피어났다. 잊혀지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긴 겨울을 뚫고 흐드러지게 핀 꽃숭어리들이 강촌 곳곳을 수놓고 있었다.  요즘 유독 그 ‘피어나다’라는 동사에 시선이 머무는 적이 많았다.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모 아이돌 그룹의 팬클럽 이름이 ‘피어나’이기도(도독(?)) 하거니와, 뉴스를 보다 모 정당 대표의 배경으로 ‘봄이 되면 국민의 삶이 피어납니다’라는 슬로건에 눈길이 간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즐겨 보는 무협지 속 주인공의 대사 때문이었다. “화산의 검은 매화를 흉내 내지 않는다. 화산의 검은 매화를 피워 낸다. ‘매화’가 아니다. 바로 ‘피어남’이다.”  절치부심하며 과거의 영화를 되찾은 주인공이 그 시점에서 내뱉은, 그리 유별나지 않은 이 말 이후 꽃이 유난해 보이기 시작했다. 시절이 하 수상한 마당에 한 가로이 꽃구경을 떠난 까닭이 바로 그것이렷다. 광양 도사리 매화마을  보통 ‘광양’ 하면 제철소나 산업부두를 떠올리기 쉽지만 매화마을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하동을 마주하며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 마침 저쪽이 ‘하동(河東)’이니 맞은편인 이쪽이 ‘하서(河西)’쯤 되겠다. 뒤로는 쫓비산이 든든하게 받치고 정상에서 갈라져 나온 산자락들이 마을을 끌어안은 형세다. 매화는 그 품 안에서 자란다. 사람의 힘으로 만든, 일종의 과수농원으로, 가장 큰 홍쌍리 청매실 농원을 비롯해 수 개의 농원이 합심하여 마을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일대에서 ‘광양매화축제’가 진행되고 있었고, 방문한 날은 그 첫 주말이었다. 전날 반주(飯酒)도 참아가며 아침 ...

발행일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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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기-행] 처음엔 태백

[월간경실련 1,2월호][윤서기-행] 처음엔 태백 최윤석 회원    새해가 밝기도 했거니와, 첫 번째 원고이니만큼 ‘시작’과 관련된 장소를 찾다가 태백을 선택했다. AI의 위협을 걱정하고 달 뒤편에 비행선을 보내는 시대라지만, 왠지 모르게 매년 이맘때가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을 손에 쥐고 싶어진다. 빠짐없이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순수한 성의가 아닐까 싶다. 또다시 어느 틈엔가 부쩍 가까워져 있을 연말의 스스로에 대한.  한강과 낙동강은 물론 한반도 여러 정맥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예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한다면, 옛사람들에게는 태백산이야말로 가장 그럴듯한 장소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선지 그곳에서는 까마득한 상고시대부터 무언가를 염원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오늘날에도 천제단에서는 단군왕검을 기리는 제사가 이어지고 있다. 그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DNA에 각인된 태고의 기억이 나를 태백으로 이끌었다는 말인데, 풀어놓고 보니 이런 ‘도를 아십니까’ 류의 장광설도 신년 벽두니까 가능하지 싶다. 황지(潢池), 전설 따라 천삼백 리  퇴근을 조금 일찍 하고 곧장 태백으로 내달렸다. 창문을 다 올렸으니, 찬바람이 들어올 리 없는데도 티 없이 맑은 하늘에 눈이 시렸다. 반대로 오후의 햇살은 헐벗은 숲의 정경에까지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기에, 메마른 나무들로 뒤덮인 산 능선이 마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커다란 리트리버의 등허리처럼 윤기나게 빛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태백을 위시한 한강수계 영서산간의 도시들을 떠올릴 때 가장 앞에 있는 이미지는 이 자연일 것이다.  그런 태백에서 유일하게 야경 명소로 알려진 곳이 황지연못이다. 규모는 작지만, 소도시가 심혈을 기울여 가꾸고 매만진 도심 속의 쉼터는 나름의 아기자기한 운치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작은 웅덩이에서 장장 천삼백리에 이르는 낙동강 물줄기가 시작된다. 그 흥미로운 어필 포인트는 황지연못으로 하여금 일반적인 도심 공원과는 다른 아우...

발행일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