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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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경실련의 토지 공개념 운동, 돋보이는 운동 의제였다

경실련 참여의 시작 인천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여하고 연대하였다. 인천 경실련 활동 중에 고유활동을 몇 가지 찾긴 했는데, 처음보다 요새 일감이 줄었다. 서울에서 1989년에 경실련 창립할 때는 경실련에 대해 모르고 나중에야 알았다. 그 때는 토지 공개념이 중요한 화두였다.  그 때 당시 토지 소유가 편중되어 있다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 가톨릭대학 신학대학에서 가톨릭 사회교육이라는 과목을 가르쳤는데 강의 중 토지 공개념에 관해서 가르치다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다루는 것을 보고는 괜찮은 단체라고 생각했다. 신문에서 보고 혜화동 로터리에 국민은행에 갔는데 창구 옆에 가입서가 있길래 써서 보냈다. 그 이후에 인천으로 90년 2월에 다시 왔는데. 인천으로 내려오기 전에 가입했다. 그 후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에서 경실련 회의가 있어서 참여해서 구경했는데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서경석 전 경실련 사무총장이 찾아와 얘기를 나누면서 경실련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인천 경실련의 창립과 활동  그 후 서경석 전 경실련 사무총장과 초등학교 동기라는 분이 찾아와 경실련을 인천에도 창립했으면 좋겠다고 제의했었다. 그 때는 나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92년도 9월쯤, 다시 오셔서 똑같은 제안을 하셨다. 인천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망설여졌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경실련을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그 때는 인천시의 규모가 작아서 첫 모임은 아주 빈약했었다. 인력, 자금도 부족한 상태였다. 그 때는 경실련이 위험한 단체였다. 그때는 노태우 대통령 말기였는데, 정부 입장에서는 경실련이 위험한 단체로 분류가 되었다. 겁은 안 났지만 지역의 경찰서 형사가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비판적인 성격의 단체이다보니 다른 분들도 가입하기를 어려워했었다. 인천경실련은 그렇게 뜻있는 몇 분이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성장하며 왔다. 이제 많은 분들이 가입을 하고 사회적 인식도 호의적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

발행일 2009.10.21.

칼럼
'어? 데모를 하는데 법을 지켜가면서 하네?'

<경실련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경실련 역대 임원들의 인터뷰를 기획하였다. 그 다섯번째로 박종규 전 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을  7월 8일 종로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이대영 사무총장, 위정희 기획실장과 함께 만났다.>    '어? 데모를 하는데 법을 지켜가면서 하네?'첫 번째 내가 경실련을 눈여겨 본 이유였다. 위정희| 경실련과 인연이 된 계기는 무엇인가?  박종규| 내가 자진해서 참여 했다. 89년도에 신문을 보니 경실련이란 시민단체가 처음 생겨났고 합법적 운동을 한다고 나와 있었다. 그 점에 감명을 받았다. 당시는 87년부터 노동분쟁, 학생운동 등 길에서 데모 등 거리시위를 많이들 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때 경실련은 합법적인 집회를 했다. 그것에 상당히 감명을 받아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들 모임에서 “요새 경실련이란 시민단체가 있는데, 건전하고 스마트한 단체 같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당시 내가 알던 교수 한 분이 서경석 경실련 사무총장을 소개해 주었다. 경실련 사무총장은 경실련을 만든 취지부터 시작해서 미국에서 공부한 얘기, 그 전에 감옥에 들어간 이야기 등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회비 수익으로 상근자 월급을 주기 힘들 정도로 경실련 재정이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았다. 마침 수중에 가지고 있던 수표 1장이 있기에 바로 기부했다. 그 당시에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더구나 경실련은 기업인들한테서 돈이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기부하는 사람도 없었다. 바른 경제 동인회 - ‘노동조합은 우리의 파트너다’ 위정희| 바른 경제 동인회는 어떻게 창립하게 되었나? 박종규| 그 당시, 87년도에 노동분쟁이 크게 벌어졌었다. 88년도, 올림픽 때문에 조금 주춤하다가 올림픽이 끝난 후 또 노동분쟁이 심해졌다. 어떠한 질서도 없이 한 번에 폭발할 때였다. 노,사가 치닫는 이러한 방식이 아닌 기업가가 고민할 수 있는 대안이 없나 고민했었다. 그러다가 과거의 일본도 해방 후 좌파의 노동분쟁이 굉장히 심했었다. ...

발행일 2009.10.08.

칼럼
경실련은 그 순수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경실련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경실련 역대 임원들의 인터뷰를 기획하였다. 그 네번째로 송월주 전 경실련 공동대표를  7월 6일 아차산에 위치한 용화사에서 양혁승 정책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 위정희 기획실장과 함께 만났다.> 송월주 : 경실련과의 인연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김성훈 경실련 통일협회 전 이사장이 나를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추천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남북한 문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최대 이슈였다. 그리고 인도적 대북지원에 대한 물고가 서서히 열리던 시기였고, 나는 인도적인 측면에서 화합하는 입장에서라면 하겠다고 하였다. 내가 알기론 당시 경실련 내에 통일협회와 관련하여 임원 및 조직을 개편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통일협회의 성향이 많이 바뀌었다.  아마 내가 통일협회의 성격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 듯 싶다. 임기가 만료되었을 때 다시 이사장으로 계속 있어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부터 북한을 10번정도 방문하였을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경실련 내 경불련 공동대표, 경실련 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경실련이 NGO, 시민 활동에 선도적이고, 향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 위정희: 경실련이 올해로 창립 20주년이 되었는데, 초창기 경실련에 참여하셨을 때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대표님이 계실 때가 조금 속되게 말하면 가장 잘 나가던 때였는데요(웃음). 송월주: 그렇다. 90년대 초반이었으니, 내가 대표로 있던 그 시절이 속되게 말하면 경실련이 가장 잘 나가던 때였다. 재정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관심이슈의 발굴 및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어서, 사무실은 늘 기자들, 시민들로 북적였다. 특히 함께하던 사람들도 순수했다. 그 때 경실련은 순수성을 지켰다. 송월주 : 다시말하지만, 그 때는 모든 것이 경실련을 거쳐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또한 경실련은 그 당시 존재했던 사회적인 문...

발행일 2009.10.01.

스토리
[20주년] 10년 회원, 경실련을 만나다 [호프-호프 데이 현장스케치]

경실련 10년 후원회원과 함께 한 호프-호프 데이 정리: 강영실(갈등해소센터 간사) 올해로 경실련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11월 4일 예정인 20주년 기념행사에 앞서 9월 10일 목요일 저녁 경실련회관 2층 강당에서10년 넘게 경실련을 후원하고 계신 회원님을 모시고 서로 고마움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호프-호프 데이(Hope-Hof Day)”라는 이름으로 회원님들께 초청 메일을 보내면서 경실련회관까지 오시게 하는 것이 실례이지 않을까, 어떻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드릴까 걱정이 앞섰지만 먼 길 마다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행사 시작에 앞서 상근자 공연 리허설을 합니다. 후원의 밤 행사에서 한 번 무대에 선 경험이 있지만 여전히 쑥스럽기만 합니다. 산뜻한 느낌의 파란색 새 현수막을 달고, ‘땡땡이’ 무늬가 있는 초록색 책상보를 씌워놓으니 강당이 새롭게 보입니다.   저녁 6시 30분, 회원담당인 노정화 부장이 회원들이 도착하고 계시다는 연락을 해 옵니다. 얼른 내려가서 도착하신 회원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준비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두 번째 접시를 비웠을 무렵 위정희 기획실장이 행사시작을 알립니다. 행사는 이근식 공동대표 환영사, 이대영 사무총장 감사인사, 경실련 20년 발자취 영상보고, 감사패 증정, 상근자 축하 공연, 담소의 시간, 기념촬영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근식 공동대표 환영사 “ 10년 이상 경실련의 식구로 동고동락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경실련은 계속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요즘 언론에서 잘 전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는 KBS 9시 뉴스에 경실련이 발표한 ‘서울시 구의회 해외연수 실태분석’결과가 방송되는 것을 보고 반갑고 기뻤습니다. 경실련 20년 역사 중 지금이 가장 어려운 시기인 듯합니다. 상근자들과 회원들이 어려운 상황을 꿋꿋이 잘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지는 과정이 아닌가, 어려움 겪으면서 다 같이 ...

발행일 2009.09.14.

칼럼
시민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던 경실련

Q. 회원님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실련 통일협회를 후원하고 있어요.   Q. 경실련과의 처음 인연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1996년 경실련 통일 협회의 ‘민족화해아카데미’ 강의를 듣게 되면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당연히 대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기도 했고, 북한이라는 나라가 서서히 가깝게 와 닿기 시작했었죠. 그러던 차에 경실련 민족화해 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보고 참여하게 됐습니다. Q. 제1기 민족화해아카데미 수료 이후, 어떠한 활동을 하셨나요?  제가 1기를 졸업하고, 곧 이어서 북한의 어려운 사정이 방송을 통해 알려졌죠. 그 당시에 강사님들이 사회적으로 북한학 분야에 지명도가 있으신 분들인데, 적은 강의료를 받으면서 학생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이런 정도의 단체이고 저런 분들의 강의면 들을만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문화 1기 80명, 2기는 100명. 종로에 위치한 경실련 강당 뒤 자리가 꽉 차서 서서 듣고 그랬어요. 그 사람들이 졸업하고 나서 곧 이어서 북한의 어려운 사정이 방송되고 해서, 당시 금융노조와 같이 신촌, 대학로에서 북한을 돕기 위해 모금 활동을 했어요. 정작 여유로운 사람들은 돈을 내지 않고, 노동자, 학생 진짜 어려워 보이는 분들이 돈을 내는 것을 보고 더 열심히 활동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 부녀회 회장과 함께 의류등을 기증받는 행사도 하고 했어요.   Q. 경실련이 창립 20 주년이 되었는데, 경실련 활동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포괄적으로 정책을 제시하고 이끌어줄 만한 시민 단체가 부재했기 때문에 경실련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중요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부동산 문제 그리고 IMF 이후의 많은 경제 문제들과 관련해서 대안을 제시하고, 시민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경실련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시민들의 ...

발행일 2009.08.01.

칼럼
의식 있는 시민들은 경실련의 소중한 자산

오전 내내 날씨가 흐려서 걱정했는데, 회원님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여서일까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았다. 6월 첫 주, 구로구에 위치한 구로기계공구상가에서 박흥기회원님을만났다. 박흥기 회원님과 함께 회원님의 아버님이 경실련 활동가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상가 한 쪽의 셔터를 올리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아늑한 사무실이 나타났고 우리는 그곳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Q. 경실련과의 첫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셨나요? 10년 전 경실련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그 땐 회원들의 모임이 많아 상근자 분들과 안면도 꽤 있었고요, 저 같은 경우엔 의정감시단 활동을 해보고 싶어, 시민입법학교에 참여했습니다. Q. 10년 간 경실련의 활동을 지켜보시면서 특별히 느낀 점이 있으신가요? 제가 2000년에 시민입법학교 1기로 참여했는데요, 참 좋은 활동이었는데, 아쉽게도 1기에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사회개혁단도 처음엔 야심 차게 출발했지만 결국에는 유야무야 되었고요. 지속적인 프로그램이 미흡한 것 같아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의 문제에 침묵하는 가운데, 의식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역할이 필요한데 그 점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Q. 회원님께서 생각하시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방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소신을 갖고 일하는 분들이 적다는 게 일단 가장 큰 문제겠죠. 특히 존경 받아야 할 정치인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니깐, 국민들은 점점 정치인을 불신하게 되지요. 의정감시단이 바로 이런 정치활동들을 감시해야 할텐데, 지속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사실 국민들도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활발한 참여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단 국민의 합법적인 지지를 받아 선출 된 지도자가 마음 놓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국민의 몫 같은데, 우리 국민들은 너무 비판에만 치우쳐있습니다. 물론, 비판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임...

발행일 2009.08.01.

칼럼
믿을 만한 단체, 합리적인 단체라는 소리를 들어야

‘믿을 만한 단체’, ‘합리적인 단체’ 라는 소리를 들어야 ‘예전의 성공을 오늘날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손봉호|3,4대 경실련 공동대표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양혁승| 20년이 짧다면 짧지만 경실련으로서는 성인기에 접어드는 시기다. 과정 중에 어려움도 많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위치에 이르게 됐었는데, 초창기에 중심을 잘 잡아주던 대표님들 덕분에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손봉호| 시민들의 의사를 경실련만큼 잘 표현한 기관이 없었다. 언론과 정부에서도 관심을 많이 가졌었고, 경실련의 성공 때문에 다른 시민운동들도 많아졌지만 그때는 아주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경실련이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일을 했지 않았나 싶다. 민주주의면서 시민운동이 안 되는 국가도 있는데 한국은 시민사회면서 민주주의가 더욱 성숙하게 됐다고 봐야 한다.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양혁승| 그 당시에 경실련 운동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상당히 강했었다. 그 공백을 맡은 대변기관들이 없다 보니 경실련이 태동하면서 주목을 많이 받았었다. 그 수요들과 요구들을 대변하는 역할로서 경실련이 초기에 역동적으로 잘 이끌어갔었다. 손봉호| 전까지는 민주화 운동에 사회의식이 깬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활동했지만, 민주화 된 이후로는 그 세력이 할 일이 없어졌다. 그 전 민주화 운동의 역량이 상당 부분 옮겨왔다고 볼 수 있다. 제일 처음 경제 정의, 부동산문제가 굉장히 심각했고, 정치민주화는 어느 정도 시작 됐지만 경제정의가 힘든 문제였는데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왔으니까 상당히 좋았다. 양혁승| 88년 올림픽 전후로 해서 처음으로 우리 경제에서 경상수지 흑자가 났다. 경상수지 흑자가 나니까 부동산 폭등현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세입자들의 주거문제 불안이 아주 심각했다. 집값도 폭등했고, 전세금도 폭등했다. 그 흐름이 어떤 면에서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소득을 부동산으로 이전...

발행일 2009.07.28.

칼럼
시대가 변하듯 경실련도 변해야 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오늘날 당면한 시민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더욱 중요’ 권태준| 3대 경실련 공동대표     ‘환경과 개발’의 조화를 추구하는 경실련 환경개발센터로 참여   권태준|공동대표 하기 전에 환경개발 센터일로 90년 초쯤 먼저 참여했다. 이사장이란 감투로 시작을 했는데, 분야가 대학분야랑 비슷하기도 했고, 변교수의 강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위정희|당시에 경실련 환경개발센터는 경실련의 '환경운동'이라는 점에서 어떤 의미를 두었는지? 권태준|그 당시 환경이란 이름 붙인 시민단체로는 환경운동연합밖에 없었기에 유재현박사가 시작한  경실련에서의 환경운동이 나름 의미가 있었는데, 그 당시 환경운동은 ‘사회적으로 반(反) 개발 운동이다’ 였는데, 당시 경실련은 '개발과 환경' 두 가지를 적절히 조화 시키는 적극적인 전략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해서 주로 연구사업을 했다. 환경적 측면에서 지속가능한(sustainable development)사회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고, 운동이기보다는 정책연구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시민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인간적인 끌림으로 적극활동   권태준|경실련은 처음에 주택문제로 출발 했다. 시민단체로서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그렇게 크게 발전한 건 경실련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여러 가지 기대가 경실련에 한꺼번에 집중되었다. 시대상황하고도 관련이 있었고, 87년 이후 성숙한 사회의식은 다양한 시민적 요구들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이러한 다양한 요구들이 경실련으로 집중이 되었다. 위정희|시민운동, 지금도 명확하게 활동영역을 구분하기 쉽지 않지만, 그때는 그 개념자체가 더 낯설었을 것 같다. 권태준|한국사회에서 그때 시민운동, 시민조직이란 개념이 지금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시민운동 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다라는 이해만 있었지, 일반 시민들은 ‘그게 대체 뭐 하는 건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있을 때 그 이해당사자들...

발행일 2009.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