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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한 경실련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한 경실련   김태룡 (전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 본부장)   1994년 어느 날 연구실로 온 한 통의 이메일로 경실련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경실련 공채(?) 1기로, 당시 종로 5가에 있던 경실련에 첫 발을 들여 놓은 지도 15년이 흘렀다.  정치개혁위원회에서 위원을 시작으로 정부개혁위원장,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장, 조직위원장, 서울시위원장 등을 거쳐 오는 동안, 아마도 경실련의 내우외환은 모두 경험했던 듯하다. 뇌리를 스치는 사건 만도 김현철 테이프사건, 유종성 총장 대필사건, 정보공개와 관련한 소송사건, 간부들의 한나라당 입당에 따른 대국민사과문 발표 등 고비마다 사건도 많다 보니 경실련의 산 증인이나 된 듯한 기분이다. 1994년 첫발을 들여놓은 곳이 정치개혁위원회였다. 따뜻한 안내 속에 시작된 경실련 생활이 그리 만족스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 때만 해도 경제학 교수들이 주축이 된 분위기 속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교수가 경실련에는 김석준 교수밖에 없었기에 바라보는 시선들이 그리 곱지 만은 않았다. 허나 어쩌랴! 한 서 너 해를 그리 보내다가 정부개혁위원회를 설치해 본격적으로 행정학 교수들을 영입해 그 기초를 놓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게 되었다. 당시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부추본) 본부장이었던 이석형 변호사가 부추본의 본부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간 고민 끝에 수락을 하였으나 문제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사업도 물론이지만 독립된 살림도 살아야 하고, 더 큰 문제는 당시의 환경 변화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간 부추본은 주로 고발 중심의 사안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는데,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고발 창구가 다원화되자 부추본의 활동영역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여 부추본의 운영방식이나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정책위원회와 운영위원회를 강화하고, 고발 내용보다는 정책지향적인 ...

발행일 200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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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속으로 한 발 더 나아간 시민권익보호운동

  시민 속으로 한 발 더 나아간 시민권익보호운동   조 현 (경실련 시민권익센터 대표)   경실련 창립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가 경실련과 인연을 맺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나온 세월동안 제가 몸담았던 경실련 내의 조직은 시대흐름을 반영하여 3번이나 명칭이 변경되어 발전해 왔습니다.  1989년 11월 창립된 경실련은 경제정의와 사회정의를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 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활동 과정 중에 시민들로부터 정경유착, 공직자의 부정부패, 경제 부조리 등 각종 경제부정 고발 사안들이 접수되어 그로인해 이를 전담하여 처리하고 이와 관련된 사업을 진행할 새로운 부서가 필요하여 1990년 6월에 경제부정고발센터로 설립되었습니다. 경제부정고발센터는 시민들로부터 경제부정 사례들을 접수받아 관계기관에 조사를 촉구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화하였으며, 중소상공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법률지원 및 제도적 개선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후 사회 전반적인 문제의 고발이 많아져 경실련 내에 특별기구로 1993년 7월경에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경실련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는 사회 각 분야의 부정부패를 추방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사회 각 층에서 침해 받고 있는 시민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공직자 윤리법 강화, 부패방지법 제정 등 부정부패 척결위한 제도개선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법조비리 대응, 고속도로 순찰대 상납 비리 폭로, 임수피해차량 보험금 집단청구, 부패지수 발표 등 다양한 구제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후 2004년 5월까지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다 운동의 방향을 좀 더 서민적이고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소외되고 어려운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즉 서민적 삶과 직결되는 운동을 전개하고자 경실련 시민권익센터로 2004년 6월에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민권익센터는 조산아 지원확대 등 사회적 약자를 대...

발행일 200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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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우리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아파트값 거품빼기 국민행동

  2006년 11월 우리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경실련의 아파트값 거품빼기 국민행동 - 그 현장을 함께 한 경실련 드림팀을 떠올리며,,,   홍종학 (경실련 (사)경제정의연구소장)    "2006년 11월 10일 마침내 경실련은 부동산 시국선언과 함께 부동산값 거품빼기 국민행동을 선포했다. 이 대한민국의 땅에서 항구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종식시키기를 원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물려주기를 원하는 10만 아파트값 거품빼기 서포터즈를 모으기 위해 경실련은 새로운 역사의 장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렇다. 우리는 단순한 부동산 가격 안정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시는 우리의 아이들이 부동산 투기로 암울한 나날을 보내지 않도록,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부동산 투기라는 괴물을 항구적으로, 영원히 쫓아내기 위해 우리는 나섰다.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공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닥쳐올 미래가 너무도 암울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파트값 거품빼기 국민행동' 홈페이지는 분노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로 넘쳐난다. 그러나 그건 또한 변화를 원하는 목소리이며 또다시 희망을 노래하는 국민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행동에 나설 수 있는 10만 국민이 모일 때 무엇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지금 대한민국은 당신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  2009년 가을, 지금도 2006년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 속 저 밑에서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다. 당시 10만 서포터즈 운동을 시작하면서 우리의 작은 운동이 역사를 바꿀 수 있을 것인지, 가슴이 벅차오르던 기억이 새롭다. 합리적 대안, 합리적 국민행동   당시 경실련은 국민행동을 시작하면서 '항구적인 부동산 가격 안정과 주거복지 실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3대 원칙과 4대 대책을 제시하였다.  필자는 경실련 정책위원장...

발행일 200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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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도시운동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도시운동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도시운동 하성규(전 도시개혁센터 대표)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는 경실련이 처음 태동할 때부터 가장 핵심적으로 추진한 캠페인 “토지”와 “주택”문제와 깊은 연관을 지닌다. 이를 뒷받침하는 활동으로 경실련은 “땅 -투기의 대상인가? 삶의 터전인가? (김태동, 이근식, 1990)”와 “집, 기쁨과 고통의 뿌리 (하성규 외, 1993)”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토지와 주택의 소유 편중, 이를 통한 불평등한 경제구조, 그리고 사회적 취약계층인 빈민층뿐만 내 집이 없는 수많은 서민의 주거불안 등의 문제를 우리나라 시민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토지는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하며 토지를 통한 불로소득은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토지공개념을 기반으로 하여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아울러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중심으로 주택은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였고 주택을 통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초기 경실련의 노력이 도시개혁센터를 태동하게 만든 것이다.  1996년 경실련은 시민과 함께 토지와 주택문제를 바탕으로 한 교통, 환경, 건설, 국토 등 보다 포괄적이고 확대된 영역으로 사업을 넓혀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러한 도시문제는 시민들이 주체가 되고 시민을 중심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도시개혁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1996년 6월 상임집행위원회는 “도시개혁센터”를 설립하기로 결여하였다.   나는 1996년 유엔(UN)이 터키 이스탄불에서 주최하는 Habitat II에 시민단체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미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주택, 토지, 도시, 환경 등 도시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가 설립되어 활동해 왔었다. Habitat II에서 세계 시민단체들이 심각하게 논의하고 채택한 결의문은 ...

발행일 200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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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요구를 선도하고 나선 경실련

  시대적 요구를 선도하고하고 나선 경실련   정미화 (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1999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무분별한 농지전용과 골프장 개발에 화가 났던 참에 토지정의를 외치며 정부의 인허가권을 감시한다는 시민단체가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경실련을 찾게 되었다. 전화를 하여 위치를 묻고 시민입법을 한다는 분과의 저녁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무실은 동대문 옆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사방에 책과 문건이 들어차 있고 좁게 쪼갠 서너 개의 방에 간사와 전문가 등이 빼곡하게 모여 각종 현안을 논의하던 것을 보던 일이 눈에 선하다. 오래 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시민입법 분과는 김성남 변호사님이 담당하셨는데, 30을 간신히 넘긴 젊은 변호사의 참여를 기쁘게 맞아 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간이 지난 뒤 예전 일을 돌이키려면 희미한 기억 속에 사실보다는 당시의 감정이나 느낌이 우선 떠오르게 된다. 60년대 이전은 오래된 흑백사진의 누런 색감으로, 그리고 70년대는 약간씩 선 빛이 나는 칼라사진의 어색한 색감으로 기억이 채색된다. 80년대나 90년대는 애매하다. 사회에 뛰어들며 거침없이 삶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던 시기인지라 기억의 내용이나 색감이 분명하지 아니하다. 모든 것이 좌절로 점철되는 것으로 느껴져 세상이 잿빛으로 보일 때도 있었고 한 없는 자신감으로 붉은 빛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경실련은 이렇듯 색감조차 분명하지 아니하던 30대 초반의 나이에 나와 조우하게 되었다.    초창기의 경실련에는 사람과 일이 있었다. 사회적인 문제는 경제정의의 관점에서 모두 한 번 점검해 볼 수 있는 시절이었는데, 그 전에는 정부가 행하는 일에 민간이 의견을 내어 놓거나 반대를 하는 일이 관념적으로 조차 허용되기 힘든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정당 정도가 정부의 정책에 이의를 걸 수 있었고, 언론사에서 시책과 반대되는 논조를 발표하는 것은 지사적 기질을 가진 기자에 한정되었다.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주의 투쟁을 하던 투사와 일반 ...

발행일 200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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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에서 과학기술 운동을 한다(?)

경실련에서 과학기술 운동을 한다(?)   황이남(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  1994년 봄, 나는 미원(현 대상)의 임원으로서 회사의 미래를 개척하는 중앙연구소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었기에 시민운동에 시간을 할애하기가 쉽지 만은 않았다. 더욱이 평생을 공장과 연구소에서 기술자로 살아 온 나는 시민운동을 하는 경실련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하고 무슨 일을 하는 지 궁금했다. 그 당시 나에게 경실련운동과 관련하여 접촉해 온 사람은 전 과학기술위원장을 맡았던 양지원박사(KAIST교수)로서 기술판사제도 도입과 특허법원 설립에 관한 과학기술계의 요청이 뜨거워지면서 경실련이 중재자의 입장이 되어 문제를 풀려고 하는 데, 그 분야의 전문가가 없던 차에 재야변리사로서 경실련에 대한 나의 자문 형태의 활동은 전문성과 책임감에 목말라 했다. 그 당시 경실련은 이런 민감한 사안에 대하여 내가 재야변리사이므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적임자로 생각되었는지 나에게 경실련회원으로 가입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 들여 그 때부터 경실련활동을 하게 되었다. ‘기술판사제도 도입과 특허법원 설립’에 관하여 수차에 걸쳐 경실련이 공청회를 주관했고, 국내 과학기술계 및 대법원 등과 협의를 거쳐 경실련의 최종 입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 후 정부측에서 특허청과 대법원이 협의를 거쳐 기술판사제도는 유보되고 ‘특허법원’ 만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시민운동을 처음 하는 나로서는 큰 보람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나는 회사생활 하면서 경실련 과학기술위원회 활동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아 대부분의 일은 자원봉사자들과 상근자들의 협조를 받아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부정부패고발본부를 통해 과학기술분야의 민원도 접수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자동차브레이크시스템(ABS)성능’에 대한 진정사건의 경우는 자동차주행시험장에서 ABS 성능을 직접 확인하고 그 결과가 방송에 보도가 되기도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

발행일 2009.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