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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산책] 삼선교의 여름

[월간경실련 2023년 5,6월호-우리들이야기(4)] 삼선교의 여름 최윤석 사회정책국 간사 그곳에서는 언제나 젖은 풀 내음이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 라고 할 수는 없다. 정확하게는 그곳을 떠올릴 때면 젖은 풀 내음이 난다. 한성대입구역을 빠져나와 삼선시장 초입의 안동전집 맞은편, 가로수 그늘 아래에 서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가 아니고. 아직은 여리게 흐르는 성북천 웃물 머금고 사춘기 소년의 머릿발처럼 제멋대로 자라난 수생식물들이 야성을 드러내고, 복개광장 아래 인공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도심 매연에 찌든 고막을 씻겨낸다. 여름이었다, 랄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곳에는 언제고 여름인 것만 같은 분위기가 있다. 능수버들이 길게 드리우고 땅강아지가 재게 돌아다니던 구불구불한 옛 시골 하천의 향수가 있다. 삼선교에 갔다, 삼선교 없는. 분수마루(분수광장) 조선시대에는 이 근방을 삼선평(三仙坪)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선(三仙)이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설이 나뉜다. 근방의 옥녀봉에 세 명의 신선이 내려와 옥녀와 놀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는 설, 신라시대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한 곳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등이다. 어느 쪽으로 보나 예로부터 이곳의 산수가 수려했음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성북천 양쪽을 이어주던 삼선교는 이제 한성대입구역의 괄호 안에만 남았지만 삼선평은 삼선동으로 이어졌다. 삼선교의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위는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광장이 되었다. 새롭게 단장한 너른 나무데크 위에서 어린아이들이 바퀴 달린 것들을 타며 늦은 봄의 충만한 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노인들은 게으른 부채질로 권태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남녀노소가 한 공간을 공유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광경을 도시에서 본 게 얼마 만인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북천 일대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성북천은 근현대사를 거치며 여러 차례 모습을 감췄다가 드러...

발행일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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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산책] 낙원(駱園)의 밤

[월간경실련 2023년 3,4월호-우리들이야기(4)] 낙원(駱園)의 밤 -곡선과 어둠의 미장센- 최윤석 사회정책국 간사 ‘낙산’에서 ‘낙(駱)’자의 훈은 ‘낙타’이다. 이번 달 ‘혜화산책’ 제목에 쓸만한 말장난 거리를 찾아보다가 알게 됐다. 기껏해야 ‘떨어질 낙(落)’, 더 가봐야 ‘풍류 락(樂)’ 정도나 되겠지 싶었는데 정말로 ‘낙타 낙(駱)’이었을 줄이야. 심지어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아예 대놓고 ‘낙타산(駱駝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도심에서 뜬금없이 솟은 낙산의 가늘고 긴 능선을 보며 종종 낙타의 봉(峯)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렇단다. 그래서 낙타산이란다.1) 2) 참, 조상님들 보시는 눈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다가도,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사람들이 이역만리 타국에만 살던 낙타를 어떻게 알았을까? 미스터리가 남는다. 그것도 낙산이라는 이 친근한 산의 메타포로 삼을 만큼 익숙했다니. 귀 기울여 정적을 듣는 시간 어쨌거나 다시 낙산에 올랐다. 낙타의 등처럼 생긴 그 능선을. 평지에 조성된 공원이 기껏해야 2차원의 움직임을 허락하는 데에 반해 이 낙타 등 위에서는 3차원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것도 그냥 낙타가 아니라 굽이굽이 척추가 측만한 낙타라서, 한낮의 낙산은 이벤트 밀도3)가 높은 거리처럼 점하고 싶은 지점들이 다채롭고 또 많다. 그러나 밤의 낙산은 그 많은 이야기를 암막 뒤에 숨기고 성곽의 선과 면으로만 남는다. 달도 밝지 않은 하현이었다. 창경궁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타이어 마찰음이 먼 북소리처럼 울리는 즈음이면 그제야 풀벌레들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그리고 그보다 더 내밀한 연인들의 간질거림이 들려온다. 이 은밀한 밤을 겨우내 기다려 왔다. 쿨타임4) 찼다. 밤공기에 아직 겨울의 잔향이 설핏 느껴지는, 이맘때쯤이면 더할 나위 없다. 모처럼 만나는 리즈시절5) 낙산의 전경을 몇 컷의 사진 속에 담아보았다. 이세계로 가는 길 근처 노포(老鋪)에서 치킨에 소주 한잔을 걸쳤다. 문을 나서자 완연...

발행일 202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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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산책] 혜화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곳

[월간경실련 2022년 11,12월호-우리들이야기(4)혜화산책] 혜화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곳 - 학림다방, 학전소극장 - 박지훈 경제정책국 간사 대학로, 서울을 대표하는 ‘대학 번화가’의 상징적인 곳이다.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문화와 낭만을 느낄 수 있다.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1979년 개관한 아르코 예술관, 1981년 지어진 아르코 예술극장, 예술가의 집과 함께 ‘ㄷ’ 자의 구도로 배치된 붉은색 벽돌의 건물을 볼 수 있다. 가을의 정취, 마로니에공원의 은행나무와 단풍, 아름다운 건축물의 조화는 오로지 대학로에서만 느낄 수 있다. 이번 혜화 산책은,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대학로’의 ‘학림다방’과 ‘학전블루 소극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깊어지는 가을,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심지 ‘대학로’에 빠져보자. 사무실을 벗어나, 대로변에 있는 ‘학림다방’에 방문했다.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나무계단을 지나 도착한 곳엔 ‘1970년대 감성’이 있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젊은 청춘들 사이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신사들이 많았다. 낡은 테이블, LP판, 불편하고 좁은 좌석까지 요즘 카페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평일 낮에 방문했는데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카페의 감성을 느끼는 사이에 자리가 만석이 됐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마시지 못했다…. 1956년 종로구 동숭동에 개업한 학림다방은, 서울대학교가 혜화에 있었던 그때 그 시절부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전하기까지, 문리대 학생들의 ‘아지트’로 사용됐다. 상호 관련해서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이 학림다방에 착안해 ‘학림제’라는 축제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 학생들이 얼마나 자주 갔으면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 강의실’이라는 애칭으로까지 불렸을까? 싶기도 하다. 1956년 대학로에 이양숙이 개업했고, 1975년에 강준혁·신선희가 운영하였다. 4대 사장인 이충렬 대표가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학림다방은 1981...

발행일 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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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산책] 창경궁 대온실에서 미리 만나는 가을

[월간경실련 2022년 9,10월호-우리들이야기(5)혜화산책] 창경궁 대온실에서 미리 만나는 가을 박은소리 경제정책국 간사 오늘은 <혜화산책> 가을 편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보통 혜화에는 연극 같은 문화생활을 즐기러 많이들 찾아 오시는데요. 관람을 마치고 맛집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 성균관대입구 사거리로 들어서면, 언제 복작거렸냐는 듯이 완전히 색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답니다. 거리에는 벌써 창경궁에 온 것처럼 한복 대여나 티켓 할인 등을 하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조금 더 걸어가면 여느 고궁처럼 창경궁 돌담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 더워진다 싶을 정도로 걷다 보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나옵니다. 창경궁의 입장료는 기본 1,000원입니다. 조건에 맞거나 한복을 입고 가면 무료관람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찾아간 날에도, 한복을 입고 스냅사진을 찍는 가족의 모습을 왕왕 볼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 비해 궁궐에서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제법 자연스러워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야간 개장 시간을 노려 멋진 가을 밤 풍경을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대온실>이기 때문에 출입구에서 곧장 오른쪽으로 꺾어 걸어갑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즐비해 있는 작은 숲을 지나니 <춘당지>가 보입니다. 아직 녹음이 건재하지만, 색색의 옷을 입은 아름다운 단풍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춘당지랍니다. 가만히 물결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검은잉어와 원앙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본래 이 앞쪽 연못은 <내농포>였습니다. 내농포는 과거 왕이 백성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 손수 농사를 지었던 논입니다. 이를 일제가 파헤쳐 연못을 만들어 지금의 춘당지가 되었습니다. 뒷쪽의 작은 연못이 과거 본래의 춘당지 모습이니, 춘당지 앞에서 옛 발자취를 한 번 찾아 보세요. 대망의 <대온실>입니다. 저는 여러 번 찾아갈 정도로 대온실을 좋아하는데요. 대온실은 밤...

발행일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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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산책] 경실련 뉴비를 위한 낙산공원 튜토리얼

[월간경실련 2022년 7,8월호-혜화산책] 경실련 뉴비를 위한 낙산공원 튜토리얼 최윤석 기획연대국 간사   혜화산책이 오늘 찾은 곳은 낙산공원입니다. 정확하게는 낙산공원 다녀오는 길이랄까요. 이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 따로 설명이 필요하겠냐마는, 굳이 보태자면 낙산은 경실련 동숭동 사무실 바로 뒤에 있는 작지만 매우 유명한 산입니다. 그런데 낙산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들이 눈에 잘 띄지 않다 보니, 사무실 근처에서 종종 사람들에게 ‘낙산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하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에 한번 가보고 싶어도 입구가 어디인지, 얼마나 걸릴지에 대한 감이 없었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신입 입장에서 혹여 길을 잃거나 예상치 못한 일로 사무실 복귀가 늦어질까 두려웠던 게지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평소에 걷는 산책루트를 한번 소개해 볼까 해요. 당시의 저처럼 낙산을 처음 가고자 하는 후배가 있다면 좀 더 쉽게 마음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독자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시겠지요. 여느 때처럼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사무실을 나섭니다. 건물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경실련을 품은 동숭3길 주택가를 만납니다.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갈지 선택을 해야 해요. 시계방향으로 가려면 오른쪽을, 반대 방향으로 가려면 왼쪽을 고르면 됩니다. 저는 오른쪽이 좋아요. 그편이 경사가 더 가파르거든요. 덕분에 오르막길을 오래 걷는 수고로움을 피할 수 있어요.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주택가답게 작은 놀이터가 하나 나옵니다. 신입 때는 일이 안 풀리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남몰래 찾아 시름을 달래곤 했었지요. 멍하니 앉아 느릿느릿 그네를 움직이고 있으면, 동네 꼬마들이 ‘다 큰 어른이 이 시간에 왜 저러고 있담’ 하는 것 같이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놀이터를 끼고 모퉁이를 돌면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경사진 고갯길이 나오는데 거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발행일 2022.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