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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권의 책보다 더 가치있는 경험, 경실련

  만 권의 책보다 더 가치있는 경험, 경실련 김상겸(전 경실련 정책위원장) 시민단체로서 경제정의실천연합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화과정에서 등장한 경실련은 그 명칭 그대로 경제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시민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분석하여 그 대안을 제시하는 시민단체의 맏형으로 20년의 세월 동안 많은 활동을 해 왔다. 경실련 이전에 시민단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경실련이 결성되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분야별로 많은 시민단체가 만들어졌고, 시민운동이 체계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의 경실련활동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지만, 시민운동의 그 순수한 열정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경실련의 창립멤버는 아니지만 오랜 기간 시민입법위원장을 하였고, 지난 대선 때는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활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경실련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실련이 창립될 당시 필자는 한국에 없었기 때문에 인연을 맺으려고 했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누가 언급한 것처럼 인연이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하였는데, 필자 역시 우연한 기회에 경실련이 주최하는 토론회에 참여하였고, 이를 통하여 경실련에 가입하였다. 당시 경실련에는 사무총장으로 현 법제처장을 맡고 있는 이석연 변호사가 있었고, 시민입법위원장에는 숭실대 강경근 교수가 활동하였다. 독일에서 유학하던 중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지켜보았던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시민단체에 가입한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단지 회원이었던 필자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그냥 우연이었다. 당시 학회활동을 같이 하였던 강교수가 건강문제로 임기가 남은 시민입법위원장직을 수행하기 어려워지자, 그 잔여임기 동안 시민입법위원장직을 대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연 아닌 우연으로 ㎰坪攘...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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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경실련

  시민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경실련                           김동흔(전 경실련 협동사무총장)                     1989년 경실련 창립에 불교계의 재가(在家)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경실련 창립 당시 만연한  부동산투기로 인한 주택 값과 전세 값의 폭등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었다. 부동산투기로 횡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폭등하는 전세 값을 감당하지 못해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자살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회부조리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민들이 땀 흘려 일해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지고, 아파트 분양 추첨에 당선되면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버는 불로소득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부정의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문제 제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적 상황에서 경실련이 창립하였다.  경실련은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이루는 민주복지 건설”을 창립목적으로 내세웠다. 당시 반독재․반체제를 내세우며 민중계급을 바탕으로 체제변혁을 추구하는 정치적 사회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합리적인 정책적 대안을 통한 비폭력적인 운동방식으로 사회개혁을 이루겠다는 경실련의 운동방식은 새로운 도전이었고 좌우 양편으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경실련 창립은 그 동안 방치돼왔던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언론과 시민들로부터는 많은 호응을 받았다. 경실련의 창립으로 우리나라의 사회운동이 민중계급에 기초한 계급적 혁명운동에서, 정책 전문가와 일반시민이 결합하여 사회정의와 경제정의를 실현하려는 시민운동으로 변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은 경실련에 참여하는 불교인 200여 명이 주축이 되어 1991년 7월 13일 창립했다. 경불련(經佛聯) 창립 당시, 불교계는 우리사회의 민주화 진행속도를 따라가지 ...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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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혁과 시민참여의 메카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도시개혁과 시민참여의 메카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권용우(전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운영위원장)  1996년 6월 이스탄불에서는 세계 180여 개국 2만 여명의 도시전문가들이 참석한 도시정상회의가 열렸다. 이스탄불 회의는 도시개혁운동의 논거를 제공하는 동시에, 민간기구가 정부기구와 동반자 관계를 이루며 도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는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와 1995년의 삼풍백화점 대참사로 국민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이런 가운데 1995년부터 실시된 지방자치제는 우리사회에 순기능을 준 면이 있다.   이러한 국내외적 시대흐름을 도시문제로 묶어 시민운동으로 승화시킨 곳이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삼풍 참사 1주년을 맞는 1996년 6월 28일에 도시개혁 시민운동을 선언하고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를 만들기 위해 준비했다. 성수대교붕괴 2주년을 맞는 1996년 10월 21일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발기대회를 개최하였고 1997년 6월 28일에 도시개혁센터를 창립했다.  서울대 권태준 명예교수, 경원대 최병선 교수(전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장), 중앙대 하성규 교수(전 한국주택학회장), 한양대 김수삼 교수(전 대한토목학회장), 성신여대 권용우 교수(대한지리학회장), 유재현 박사(전 경실련 사무총장), 중앙대 김명호 교수(전 대한건축학회장), 홍 철 박사(전 인천대 총장), 중앙대 이경희 교수(전 대한가정학회장), 충북대 황희연 교수(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장) 등이 앞장서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를 만들었다.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는 지속가능한 도시, 친환경적인 도시, 시민 중심의 도시, 균형특화된 도시, 살기 좋은 도시 등을 도시개혁운동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1997년 창립한 이후 2004년까지 경실련 도시개혁센터가 이루어 낸 주요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광역도시권 설정과 광역도시계획이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그린벨트 해제를 공...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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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의 20년, 우리 사회 미래의 200년

  경실련의 20년, 우리 사회 미래의 200년 김성훈(전 경실련 공동대표) 나는 1989년 경실련 창립에 한 발짝 늦게 참여하였다. 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족적을 찾아 중국 대륙을 헤매고 다니다가, 문득 경제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농업 환경 통일 분야의 아젠다 개혁이 필수불가결하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1년 늦게 경실련에 몸을 들여 놓았다. 첫 번째 부딪친 난관은 경실련 출범시의 2대 과제였던 금융실명제와 토지公개념 정책의 실현이었다. 금융실명제는 숱한 저항과 반대 찬성 등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시행되었다. 선진국에 비해 너무나 늦은 제도개혁이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 볼 때 그때 경실련이 치열하게 싸워 성취하지 못했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부정부패와 사기 횡령 범죄가 더 팽배했을까. 그러나 당시 현재와 미래를 투시해 볼 때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을 정치 경제 사회제도면에 실현해내지 못한데서 파생된 사회 각 분야의 부작용-투기와 부정 부패의 창궐을 미리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 당시 고위관료를 앞세운 기득권 세력의 반대 로비(?)에 경실련 볼런티어 내부의 의견이 분열되어 순진한 조세주의 정책해법에 굴복한 것이 지금도 우리 경제사회에 엄청난 손실과 비리를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위장전입과 불법농지매입을 하지 않은 임명직 고위관료가 없다고 할 만큼 사회 각계의 지도층들이 솔선하여 범법 투성이가 된 현상이 상당부분 우리 경실련의 나이브했던 운동 때문이라고 말해도 변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우루과이 라운드(UR)에 임한 경실련의 신속 정확한 정보와 대안 중심의 경제정의실천운동의 교훈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제국의 협상 동향정보를 신속히 단독 입수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갖춘 경실련은 단군 이래 최초로 186개의 정치, 종교, 환경, 소비자 시민단체들을 망라하여 쌀과 기초농산물 지키기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후에 ‘우리 쌀, 우리 농업 지키기 범대위’로 개칭)를 이끌었다. 비록 ...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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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주장, 공동선을 위한 최고, 최선의 정답이어야

  경실련 주장, 공동선을 위한 최고, 최선의 정답이어야 박세일(전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이제는 오래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앞으로 우리사회에서 체제 내의 시민운동과 전문가집단(교수, 학자 등)이 함께 하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처음하게 된 것은 1980년 대 말이었다고 기억한다. 사실은 관악구 남현동에 있는 나의 집에서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서경석 목사와 둘이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이야기하다가 이러한 생각을 같이 하게 되었다. 당시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던 [반체제적 재야운동(反體制的 在野運動]이 사회 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이제 우리사회도 1987년을 계기로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反체제 운동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올바른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反체제가 아니라 [체제내 운동(體制內 運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체제내 운동이라면 선진국의 시민운동이 우리에게 참고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단순한 시민운동만으로는 부족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왜냐하면 [체제내 운동]이라면 정부가 하는 일에 무조건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비판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민과 정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정부의 정책을 올바른 戀袖막?유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요컨대 정부비판이 단순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대안을 가진 생산적 비판]이 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반드시 교수 학자 등 정책전문가들과 함께 하는 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는 정책과제 (당시는 부동산 인플레가 큰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드는 시민운동과 생산적 정책대안을 만드는 전문가운동을 결합한 경실련이란 아이디어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2~3주 후에 나는 이근식 교수 등 학자들에게 연락하고, ...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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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사회 변혁의 꿈을 이루는 창구

  경실련-사회 변혁의 꿈을 이루는 창구 김철환(상임집행위원회 부위원장) 나는 1987년 민주화 운동 당시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내가 있던 부대는 유사시 남침하는 북한군을 타격하는 부대였지만 당시 군사정권에서는 유사시 소요를 진압하고 성균관대학교(서울캠퍼스) 접수하는 임무도 맡았다. 병사들은 거의 매일 충정훈련이라는 소요 진압 훈련을 받았다. 나는 1988년 4월 전역 후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에서 수련을 시작할 때까지 사회 곳곳에서 움트고 있었던 시민사회운동의 태동을 군대에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전공의 수련이 시작되면서 나는 기독학생회 OB 출신들이 1987년에 만든 기독청년의료인회(기청?라는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대학생활 내내 기독학생회의 주말진료, 농촌봉사활동, 학내 진보적 성경공부 활동에 참여했으니 기청의 활동에 합류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1989년 기독학생회 출신들이 대거 참여한 경실련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자주 나가던 기청의는 경실련이 종로5가 사무실을 쓰던 때에는 방 한 쪽을 사무실과 성경공부 공간으로 사용할 정도로 경실련과 가깝게 있었다.   나는 1992년 이후부터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중앙위원으로, 또 보건의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보건의료위원회는 의료보험 통합, 각종 리베이트 등 의료계 비리 퇴치, 약값 거품빼기, 의료보험 급여 확대 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펼쳤다. 1977년 시작한 의료보험이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으로 통합되어 전 국민이 건강보험증 혹은 의료 급여증을 갖는 시대를 여는 데 경실련과 제 시민사회단체들도 큰 기여를 하였다. 경실련 보건의료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산하 제 위원회나 활동에 참여하여 정책을 결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실련 보건의료위원회의 최대 위기는 2002년, 2003년 의약분업과 의료대란이었다. 당시 보건의료위원회는 의약분업이 약과 관련된 소비자의 알권리를 증진시키고 리베이트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판단하였다. 아울...

발행일 200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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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시민운동을 하는가?

  나는 왜 시민운동을 하는가? 김재석 광주경실련 사무처장 몹시 쑥스럽고 고통스럽다. 운동권(?)에 속한 삶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요새처럼 힘들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얼마쯤은 내게도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면 정리될 만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길고 많아졌다. 지난 1년을 일에서 벗어나 미국의 소도시에서 빈둥댔다. 팔자에 없는 미국생활 탓일까? 휴유증이 깊다. 만사가 귀찮고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 하루 하루가 따분하고 영 개운하지 않다. 우울증이라고 자가 진단하고 세월이 가기만 기다리고 있다. 내년에 달라질까? 이런 넋두리가 싫어서 한사코 거절했던 것인데 기어이 잔머리를 굴리는 내가 싫다. 상상력이 고갈돼 감흥이 없다. 기왕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내놓을 만한 그럴 듯한 이유나 공감이 있어야 한다는 치사한 욕심까지 나를 괴롭힌다. 가슴만 답답하고 목이 타들어 간다. 더더구나 내밀한 자기반성의 글도 아니고 20주년 기념행사 어디어디에 실릴 걸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뒤통수가 가렵다. 뻔히 다 아는 처지에 시민운동에 대해 썰을 풀면 또 얼마를 풀 수 있을 텐가. 피터지게 열심히 하는 운동가도 아니고 귀동냥했던 남들 다 아는 얘기 적당히 둘러대서 써먹고 며칠 못가서 다 잊어버리는 뭐 하나 똑 부러지게 했던 기억이 없다.   낱말 퍼즐 맞추듯 자판기만 이것 눌렀다 저것 눌렀다 온갖 지랄을 다 부린다.  내게 원고 부탁한 것 잊고 연락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위정희 국장 전화부터 피한다. 술 먹으며 노는 자리에서는 제법 ‘이빨’이 먹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씨도 안 먹힐 것 같은데... 지역에서 운동하면서 느끼는 간단한 소회도 좋고 어떤 것도 무방하다는 이대영총장 말만 귓가에 윙윙거린다. 벌 받는 느낌이다. 공돌이 생활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 땐 확신이 넘쳤다. 아는 대로 말했고 해야 하는 일이면 고민 없이 했다.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힘은 충분하다고 느꼈다. 지금은 건강하지 ...

발행일 200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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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운동에 참여하면서

경실련 운동에 참여하면서 선월 몽산 (사)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     저는 지난 7월2일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경실련 운동에 처음 참여하였습니다. 경실련운동의 막내 중에 막내입니다. 경실련 창립 20년을 맞아 전ㆍ현직 임원들과 함께 이런 글을 쓰려고 하니 자격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합니다. 처음 사무국으로부터 원고 부탁을 받고서 고사할까도 생각했는데, 막내로서 이번 기회를 통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경실련 운동을 지켜온 회원들에게 인사드리는 것이 예의 일 것 같아 이렇게 몇 자 적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시민운동에 문외한 일뿐 아니라 경실련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언론에 경실련이 보도될 때마다 참 좋은 단체라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분들이 참여하고 어떻게 조직되어 운영되는지 알 수 있는 기회를 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1962년, 12살에 출가하여 그간 대부분의 시간을 산중에만 머물렀고, 지역적으로 남도 끝자락인 해남, 목포 등지에서 지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봄에 경실련 통일협회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고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경실련을 잘 모르는 것도 있지만, 이 보다는 대표적 시민단체에서 역할을 맡아 그 소임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오히려 크나큰 누를 끼치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저와 인연이 있으시고 이미 경실련에서 통일협회 이사장과 공동대표를 역임하신 김성훈 전 대표께서 격려와 힘을 주시고 ‘통일운동이 어려운 시기에 이를 회피하시면 안 된다’라는 말씀을 듣고 감?용기를 내어 미력하지만 조그마한 힘을 보태고자 경실련 통일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김성훈 전 대표께서 ‘경실련 통일협회는 모든 관념적 논의를 배격한 실사구시에 입각한 합리적 통일운동, 보통시민의 평범한 정서에 기초한 운동으로 범국민적 합의에 기반 한 통일운동을 지향하기 때문에 和而不同하면서 求同存異를 실천하...

발행일 2009.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