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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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한국과 중국의 NGO 활동가들이 만나다

“시민단체 대표 및 실무자 중국연수” ‘시민의 신문’에서 주관하는 중국방문 행사의 제목은 그랬다. 처음 외국에 나가는 설렘으로 맞이한 중국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정말 넓은 곳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도시는 북경, 상해, 소주, 남경 모두 4곳이었는데, 도시 주변지역을 움직일 때는 물론이고 도시 안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일 때 마다 우리는 전체 일정의 상당 부분을 이동하는 시간에 할애해야 했다. <사진 : 만리장성> 맨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곳이 북경이었다. 매번 우리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이동전이나 후에 사진을 찍곤 하였는데, 중국에 도착한 기념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현수막을 펼치는 순간 중국 공안이 굳은 얼굴로 다가와 치우라는 손짓을 하였다. 우리는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연수 제목만이 적힌 별 내용 없는 현수막을 서둘러 접으면서도 한 장의 사진을 남기고서야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우리는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번번이 중국 각 곳에서의 얼굴 도장 찍기를 그만두지 않았는데, 그것도 중국이라는 대륙만큼이나 나에게는 낯설게 다가왔다. 중국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기 위해 간 곳은 북경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도심의 한 곳이었다. 도로 주변에 30층 이상의 높게 솟은 빌딩과 아파트들이 여느 도시 못지않게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여기가 중국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중국은 도시화되어 있었다. 중국의 고층빌딩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 정체모를 냄새에 속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고통스러운 시간의 서곡이 시작되었다. 나는 중국에서 향신료가 든 음식을 먹기는커녕 냄새 맡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평소 보신탕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었던 내가 중국의 향신료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터라 나로서도 상당히 당혹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향신료가 든 음식 대신 ‘찡따오’ 맥주로 허기를 달랬다면 다른 사람은 기내에서 챙긴...

발행일 2005.07.06.

스토리
"여보세요? 좀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어제  점심후 자리에 앉아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는데, 경실련 대표전화로 전화가 울렸다. 큰 목소리로 중년의 아주머니가 쉴새없이 혼자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주의깊게 들으려 했으나, 목소리가 너무크고 말이 빨라 "천천히 말씀해주세요'라고 몇번 이야기 했는데도, 나의 목소리는 아주머니의 음성에 묻혀 버렸다. 아주머니의 이야기 전개는 사건순도, 시간순도 아니다. 주제도 다세대주택과 관련된 것부터 시작해서, 여야, 사법부, 행정수도까지 거론하는데, 정말 좀처럼 집중해서 듣기 어려웠다. 나에게 도무지 틈을 안주고, 내가 뭐라고 말을 하던 상관없이 아주머니의 일방적 이야기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나오듯 해서, 나중에는 귀가 아플정도였다. (수화기를 살짝 귀에서 때자, 주변사람들이 다 들릴정도였다.) 난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이런 성격의 전화가 오면 언제나 그러하듯이.. 경실련으로 걸려오는 전화 난 경실련에 처음 입사했해서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지금의 ’시민권익센터‘)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예고없이 방문하는 민원, 정확한 담당부서로 연결시켜 줄수 없는 전화는 모두 이 부서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개인 문제를  시민단체가 대신 나서서 해결해주길 원하는 시민,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청와대- 부패방지위원회- 국회등 모든 곳으로부터 민원제기를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채 박스만한 민원서류를 들고온 민원인, 시민단체가 정부의 활동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시민, 밤만 되면 약주한잔하고 거칠게 전화주는 시민, 대학 수업의 리포트를 위해 정보를 가공, 요약해 달라는 대학생 등.. 가장 난감한 전화 여러 목적을 갖고 많은 시민들이 경실련에 전화를 준다. 전화중 가장 난감한 성격의 전화가 있는데, 바로 이런 전화다.  - 이혼후 살가망이 없다고 자살하겠다는 중년남성의 퇴직한 고위공직자.  난 그에게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그만큼(고위공직자) 잘 살았으면, 이제 고생도 해볼때가 아니냐고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사람인생...

발행일 2005.07.06.

스토리
壬午(임오)에서 甲申(갑신), 그리고 乙酉(을유)를 기대하며

壬午년(2002년) 대한민국 월드컵 첫 4강 진출의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었던 10월, 시민단체의 맏형인 '경실련'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처음으로 나의 시민운동이 시작되었다. 누구나 그랬듯이 나 역시 "하나의 작은 몸짓이 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작은 기대감 속에 경실련에서 상근활동가로 시민운동을 시작한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짧고도 길었다고 할 수 있는 그 기간 동안 경실련과 경제정의연구소에서 일하며 느꼈던 점을 몇 자 적어 볼까 한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경실련에서 나 자신에게 주어졌던 일 중 기업들에 대한 사회적 성과평가는 평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우수한 기업에 대해서는『경제정의기업상』이란 시상식으로 형상화가 되며, 금년이 14회 이다.『14회 경제정의기업賞』을 준비하면서 어떤 수상 기업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윤리경영과 사회적 책임의 제고라는 경제정의기업상 취지에 맞게 저희 기업이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누구나 그럴 테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는 희열과 보람을 느끼고, 앞으로 더 잘 해 봐야지 하는 마음이 용솟음 치곤한다. 하지만 과거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상을 받았던 기업들이 사후에 불법정치자금제공, 불공정거래행위, 노사문제 등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였을 경우 앞서 느꼈던 보람에 비해 몇 배로 아픔과 허탈감이 밀려온다. 심한 경우엔 "비윤리적인 기업들에게 상을 줄 바에는 뭣하러 시상식을 하냐?"라는 말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 보다 긍정적 측면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함부로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최근 불법대선자금제공 등의 많은 비윤리적 사건이 있었지만, 기존 대기업들에서만 볼 수 있었던 윤리강령, 윤리전담부서설치 등 윤리관련 프로그램들이 공기업, 중견기업, 선도벤처기업 등으로 많이 확대 되었다는 것과 대학들의 윤리경영 관련과목 도입, 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 증가 등이 긍정적 측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상 기업들의 사후 비윤리적 행...

발행일 2005.07.06.

스토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을까

은행에 직접 가는 사람보다 인터넷 뱅킹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백화점 가는 사람들보다 온라인 쇼핑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요즘, 얼마 전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가 3천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수치로 보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인터넷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인터넷을 통해 안 되는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아니 인터넷 없이는 하루라도 못살 것 같아 보인다. 실제 경실련 사무실에서 잠깐이라도 인터넷이 되지 않을 때면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진다. 업무의 대부분이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나오는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다운받고, 관련 뉴스를 검색하고,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보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인터넷 없이 살수 없다는 요즘, 시민단체들에서도 ‘시민운동이 인터넷을 통해 어떻게 시민들에게 접근할 것인가‘ 이른바 사이버 운동의 영역이 큰 고민 중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경실련도 이같은 고민에서 출발해 지난해 홈페이지 운영을 총괄하고 전담하는 커뮤니케이션팀을 만들었다. 한사람이 홀로 홈페이지 관리만을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현재 6명의 인원이 커뮤니케이션팀에 참여하고 있다. 핵심부서라 할 수 있는 정책실이나 시민감시국에 버금가는 규모이니 홈페이지나 사이버 운동이 경실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졌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일반적으로 ‘경실련 홈페이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어렵다”, “딱딱하다” 등의 말들이 제일 먼저 나온다. 네티즌들의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아마도 경실련 운동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시민들의 생활에 밀착된 운동 방식이라기 보다는 국회나 정부를 감시하고 정책 대안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라 경실련에서 발표하는 성명이나 보도자료들이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년 전, 경실련 홈페이지는 과감(?)히 개편됐었다. 그 당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회원 참여 공간의 대폭 확대’. 딱딱한 보도자료 중심에서 벗어나...

발행일 2005.07.06.

스토리
걱정과 고민

사람들 중의 15%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걱정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의 40%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선배, 저 고민 있는데…? 불쑥 회사 후배가 말을 꺼냈다. 이제 입사한 지 갓 3개월 된 신입이다. 그래, 그럼 한번만 더 곰곰이 생각해봐라 지금 고민이 정말 고민인지 아니면 걱정인지…, 정말 고민이면 퇴근 후에 소주 한 잔…. 평소에 곧잘 친구나 동료, 후배들의 고민을 들어주던 이 친구는 회사 후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후배는 직장생활에 적응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처음 한 달 간은 신입답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고 착실했으나 점점 업무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배는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친구는 한 잔, 두 잔, 소주잔을 비우며 후배의 얘기를 듣고는 말문을 열었다. 고민을 한 게 아니라 걱정을 했구나…. 처음부터 걱정만 했지 고민은 안했어.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걱정. 만약 이런 것들을 걱정하지 않고 고민을 했다면 아마도 회사생활에 훨씬 빨리 적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걱정은 걱정으로만 그치거든.? 그러나 친구의 회사후배는 고민 끝에 사직서를 내고 다른 회사로 옮겨 갔다고 한다.  친구의 말에 고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본인은 월간경실련에서 정책실로 발령을 받았다. 그것도 내부 인사가 있던 당일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으니 오죽 혼란스러웠겠는가. 애정을 가지고 24개월 간 만들어 왔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라는 생각에 심한 배신감마저 느꼈었다. 그래서 며칠을 집에서 고민해야 했다. 사직서를 제출해야 하나…, 아니야 오히려 더 많은 걸 배울 기회가 될지도 몰라… 이 두 가지 생각은 머릿속에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는 내게 회사후배 얘기를 꺼낸 것이다.     사람들은 걱정이 많다. 비가 와도 걱정이고 안 와도...

발행일 2005.07.06.

스토리
탄핵 유감(有感)

 완연한 봄이다. 거리엔 병아리처럼 샛노란 개나리와 우아하고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백목련이 어우러져 싱그러움이 넘쳐난다. 예년에 비해 빨리 찾아온 꽃 소식에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은 특유의 젊음과 생동감에 취해 비틀거린다.  나는 항상 고민한다. 전문성도 부족하고, 성실하지도 못한 내가 시민활동가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 그리고는 이내 다짐한다. ‘모르는 것은 배우고, 항상 노력하면 된다. 중요한 건 권력 앞에 비굴하지 않고, 약자와 소수자에게 항상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아는 선배, 동료 시민운동가들은 대부분 역동적인 사고와 합리적 이성이 균형을 이룬다. 분노할 줄도 알고, 분노를 조절할 줄도 안다. 내가 요즘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분노하는 것도 이를 조절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아, 조화로운 삶이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인류보편의 합리적 이성의 원칙에 따라 법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하며, 때로는 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불복종을 실천할 수도 있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번 탄핵정국에 대해 시민운동가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었는지 난 아직도 고민 중이다. 나의 모든 태도에 정당성이 있었는지, 사회정의에 합치되는 것이었는지 등등이 말이다.     몇 년 전 아버님께서 대화 중에 불쑥 이런 말씀을 하셨다. 조선조에서 임금이 폐위된 경우가 몇 번 있었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들어보니 그런 경우가 세 번이 있었다고 한다. 삼촌에 의해 폐위된 노산군(나중에 단종으로 추존된다.), 폭정을 일삼다 폐위된 연산군 그리고 광해군이다. 대화 당시 이런 얘기들을 나누었던 것 같다. “조선왕조 500여년의 역사 속에 단 세 번밖에 그런 경우가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다. 4?19 혁명에 의해 끝내 하야하고 만 이승만 대통령, 측근에 의해 살해된 박정희 대통령, 퇴임 후 구속 수감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보면서 살아가고...

발행일 2005.07.06.

스토리
다시 힘을 얻고

주제가 주어지지 않은 글을 써야 하는 건 무척 난감한 일이다. 더구나 이름이나 얼굴조차 모르지만, 내가 하는 일을 소리 없이 도와주고 있는 많은 회원들과 접하는 지면이기에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기도 한다. 우선은 이런 저런 생각할 틈 없이 돌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눈을 돌려 약 5년 전 경실련에 처음 들어 왔을 때를 떠 올려 본다. 그 때의 나는 누구처럼 학생 운동을 경험한 것도 아니었고 ‘시민운동’이란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좋은 일을 하는 곳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발을 디뎠었다. 각 단체마다의 특성이나 활동에 대한 이해보다는 막연히 시민단체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크고 작은 문제들을 들고 오는 안타까운 이들보다도 의식 없고 무지한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 2년 여 동안 정책실에서 일하면서 사회의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던 나의 생각과 주장이 일정한 과정을 거쳐 다듬어지고, 좋든 싫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곳이 있고, 또 사회가 바뀌는 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한다는 게 신기하고 뿌듯하게 느껴졌다. 다른 데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것이 나를 지금까지 경실련에 있게 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업에 조금 익숙해지자 시민들에게 직접 다가가기 어려운 정책 중심의 경실련 운동에 회의가 생기고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여기에는 김현철 비디오테잎 사건 등을 겪으면서 경실련이 입은 상처의 후유증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위기를 겪으면서 조직을 지켜왔던 사람들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기 힘든 것이어서, 매사에 조심스럽고 신중하고 많은 염려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활동 영역이 아닌 지원 부서에 있으면서 경실련이라는 조직에 대해 보다 폭넓은 이해를 가질, 그리고 조금은 떨어져서 경실련 운동을 생각할 기회를 갖기로 했다. 기획조정실(지금의 사무처)로 자리를 옮겨 다시 2년 여 동안은 여러 가지 잡다한 살림살이와 총무 역할을 하는 것이 귀찮고 번잡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조직시스템ㆍ재정ㆍ인력(임원과...

발행일 200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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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어제 아침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10시에  잠원동에서 약속이 있었다.  집을 나서는 마음은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럽다.  운전석에서 차창 밖의 뿌연 도심을 바라보며 나는 자연스레 사무실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난 봄에 사무실에서는 새로 간사채용이 있었다.  내가 일하는 부서에서도 한 명을 뽑기로 했다.  사무처에서 1차 서류심사에 통과한 일곱 명의 지원자를 로즈수녀님과 내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연봉이 얼마라는 남이 알아주는 화려한 직장이라면 인터뷰하는 입장에서 콧대깨나 세울 수 있을텐데...  이건 지원자들에게 사정쪼로 재정형편부터 설명해야하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지원자들의 풋풋한 젊음이 싱그럽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지원자들, 그러나 경실련 근무가 그들 인생에 던질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아는 나는 그들보다  더 뻣뻣해진다.  이윤을 추구하고 창출해서 그 이익을 분배받는 곳이 아닌 곳 - 비영리단체, 영어로는 엔지오(NGO).  이곳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내가 먼저 발벗고 나서야하는 곳이다.  내 일신의 안녕과 평안을 추구하기 보다 우리 이웃의 행복을 위해 내 몸을 던져 기쁘게 일해야 하는 곳이다.  그것만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어야한다.    드디어 경제정의에 대하여 투철한 목적의식을 가진 한 사람이 선발되었다.  새로운 시민운동가의 탄생이다.  경실련등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을 간사라고 한다.  이 곳에서는 직원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간사란 중심이 되어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스스로 용솟음치는 정의감에 사회의 부조리를 고쳐보려고 감히 나선다.  거기에 대가성이란 생각할 수도 없다.       당시 두 명의 후보를 놓고 막판까지 고심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두 명이 모두 경실련에서 일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본인이 희망하던 대로 국제연대에서,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홍보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홍보팀에서 일하게 된 정양은 낭만적인 정의감에 잠시 시민단체의 문을...

발행일 200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