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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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도시운동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도시운동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도시운동 하성규(전 도시개혁센터 대표)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는 경실련이 처음 태동할 때부터 가장 핵심적으로 추진한 캠페인 “토지”와 “주택”문제와 깊은 연관을 지닌다. 이를 뒷받침하는 활동으로 경실련은 “땅 -투기의 대상인가? 삶의 터전인가? (김태동, 이근식, 1990)”와 “집, 기쁨과 고통의 뿌리 (하성규 외, 1993)”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토지와 주택의 소유 편중, 이를 통한 불평등한 경제구조, 그리고 사회적 취약계층인 빈민층뿐만 내 집이 없는 수많은 서민의 주거불안 등의 문제를 우리나라 시민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토지는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하며 토지를 통한 불로소득은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토지공개념을 기반으로 하여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아울러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중심으로 주택은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였고 주택을 통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초기 경실련의 노력이 도시개혁센터를 태동하게 만든 것이다.  1996년 경실련은 시민과 함께 토지와 주택문제를 바탕으로 한 교통, 환경, 건설, 국토 등 보다 포괄적이고 확대된 영역으로 사업을 넓혀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러한 도시문제는 시민들이 주체가 되고 시민을 중심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도시개혁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1996년 6월 상임집행위원회는 “도시개혁센터”를 설립하기로 결여하였다.   나는 1996년 유엔(UN)이 터키 이스탄불에서 주최하는 Habitat II에 시민단체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미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주택, 토지, 도시, 환경 등 도시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가 설립되어 활동해 왔었다. Habitat II에서 세계 시민단체들이 심각하게 논의하고 채택한 결의문은 ...

발행일 2009.11.06.

칼럼
시대적 요구를 선도하고 나선 경실련

  시대적 요구를 선도하고하고 나선 경실련   정미화 (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1999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무분별한 농지전용과 골프장 개발에 화가 났던 참에 토지정의를 외치며 정부의 인허가권을 감시한다는 시민단체가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경실련을 찾게 되었다. 전화를 하여 위치를 묻고 시민입법을 한다는 분과의 저녁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무실은 동대문 옆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사방에 책과 문건이 들어차 있고 좁게 쪼갠 서너 개의 방에 간사와 전문가 등이 빼곡하게 모여 각종 현안을 논의하던 것을 보던 일이 눈에 선하다. 오래 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시민입법 분과는 김성남 변호사님이 담당하셨는데, 30을 간신히 넘긴 젊은 변호사의 참여를 기쁘게 맞아 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간이 지난 뒤 예전 일을 돌이키려면 희미한 기억 속에 사실보다는 당시의 감정이나 느낌이 우선 떠오르게 된다. 60년대 이전은 오래된 흑백사진의 누런 색감으로, 그리고 70년대는 약간씩 선 빛이 나는 칼라사진의 어색한 색감으로 기억이 채색된다. 80년대나 90년대는 애매하다. 사회에 뛰어들며 거침없이 삶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던 시기인지라 기억의 내용이나 색감이 분명하지 아니하다. 모든 것이 좌절로 점철되는 것으로 느껴져 세상이 잿빛으로 보일 때도 있었고 한 없는 자신감으로 붉은 빛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경실련은 이렇듯 색감조차 분명하지 아니하던 30대 초반의 나이에 나와 조우하게 되었다.    초창기의 경실련에는 사람과 일이 있었다. 사회적인 문제는 경제정의의 관점에서 모두 한 번 점검해 볼 수 있는 시절이었는데, 그 전에는 정부가 행하는 일에 민간이 의견을 내어 놓거나 반대를 하는 일이 관념적으로 조차 허용되기 힘든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정당 정도가 정부의 정책에 이의를 걸 수 있었고, 언론사에서 시책과 반대되는 논조를 발표하는 것은 지사적 기질을 가진 기자에 한정되었다.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주의 투쟁을 하던 투사와 일반 ...

발행일 2009.11.06.

칼럼
경실련에서 과학기술 운동을 한다(?)

경실련에서 과학기술 운동을 한다(?)   황이남(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  1994년 봄, 나는 미원(현 대상)의 임원으로서 회사의 미래를 개척하는 중앙연구소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었기에 시민운동에 시간을 할애하기가 쉽지 만은 않았다. 더욱이 평생을 공장과 연구소에서 기술자로 살아 온 나는 시민운동을 하는 경실련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하고 무슨 일을 하는 지 궁금했다. 그 당시 나에게 경실련운동과 관련하여 접촉해 온 사람은 전 과학기술위원장을 맡았던 양지원박사(KAIST교수)로서 기술판사제도 도입과 특허법원 설립에 관한 과학기술계의 요청이 뜨거워지면서 경실련이 중재자의 입장이 되어 문제를 풀려고 하는 데, 그 분야의 전문가가 없던 차에 재야변리사로서 경실련에 대한 나의 자문 형태의 활동은 전문성과 책임감에 목말라 했다. 그 당시 경실련은 이런 민감한 사안에 대하여 내가 재야변리사이므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적임자로 생각되었는지 나에게 경실련회원으로 가입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 들여 그 때부터 경실련활동을 하게 되었다. ‘기술판사제도 도입과 특허법원 설립’에 관하여 수차에 걸쳐 경실련이 공청회를 주관했고, 국내 과학기술계 및 대법원 등과 협의를 거쳐 경실련의 최종 입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 후 정부측에서 특허청과 대법원이 협의를 거쳐 기술판사제도는 유보되고 ‘특허법원’ 만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시민운동을 처음 하는 나로서는 큰 보람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나는 회사생활 하면서 경실련 과학기술위원회 활동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아 대부분의 일은 자원봉사자들과 상근자들의 협조를 받아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부정부패고발본부를 통해 과학기술분야의 민원도 접수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자동차브레이크시스템(ABS)성능’에 대한 진정사건의 경우는 자동차주행시험장에서 ABS 성능을 직접 확인하고 그 결과가 방송에 보도가 되기도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

발행일 2009.11.06.

칼럼
경실련의 토지 공개념 운동, 돋보이는 운동 의제였다

경실련 참여의 시작 인천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여하고 연대하였다. 인천 경실련 활동 중에 고유활동을 몇 가지 찾긴 했는데, 처음보다 요새 일감이 줄었다. 서울에서 1989년에 경실련 창립할 때는 경실련에 대해 모르고 나중에야 알았다. 그 때는 토지 공개념이 중요한 화두였다.  그 때 당시 토지 소유가 편중되어 있다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 가톨릭대학 신학대학에서 가톨릭 사회교육이라는 과목을 가르쳤는데 강의 중 토지 공개념에 관해서 가르치다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다루는 것을 보고는 괜찮은 단체라고 생각했다. 신문에서 보고 혜화동 로터리에 국민은행에 갔는데 창구 옆에 가입서가 있길래 써서 보냈다. 그 이후에 인천으로 90년 2월에 다시 왔는데. 인천으로 내려오기 전에 가입했다. 그 후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에서 경실련 회의가 있어서 참여해서 구경했는데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서경석 전 경실련 사무총장이 찾아와 얘기를 나누면서 경실련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인천 경실련의 창립과 활동  그 후 서경석 전 경실련 사무총장과 초등학교 동기라는 분이 찾아와 경실련을 인천에도 창립했으면 좋겠다고 제의했었다. 그 때는 나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92년도 9월쯤, 다시 오셔서 똑같은 제안을 하셨다. 인천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망설여졌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경실련을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그 때는 인천시의 규모가 작아서 첫 모임은 아주 빈약했었다. 인력, 자금도 부족한 상태였다. 그 때는 경실련이 위험한 단체였다. 그때는 노태우 대통령 말기였는데, 정부 입장에서는 경실련이 위험한 단체로 분류가 되었다. 겁은 안 났지만 지역의 경찰서 형사가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비판적인 성격의 단체이다보니 다른 분들도 가입하기를 어려워했었다. 인천경실련은 그렇게 뜻있는 몇 분이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성장하며 왔다. 이제 많은 분들이 가입을 하고 사회적 인식도 호의적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

발행일 2009.10.21.

칼럼
'어? 데모를 하는데 법을 지켜가면서 하네?'

<경실련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경실련 역대 임원들의 인터뷰를 기획하였다. 그 다섯번째로 박종규 전 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을  7월 8일 종로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이대영 사무총장, 위정희 기획실장과 함께 만났다.>    '어? 데모를 하는데 법을 지켜가면서 하네?'첫 번째 내가 경실련을 눈여겨 본 이유였다. 위정희| 경실련과 인연이 된 계기는 무엇인가?  박종규| 내가 자진해서 참여 했다. 89년도에 신문을 보니 경실련이란 시민단체가 처음 생겨났고 합법적 운동을 한다고 나와 있었다. 그 점에 감명을 받았다. 당시는 87년부터 노동분쟁, 학생운동 등 길에서 데모 등 거리시위를 많이들 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때 경실련은 합법적인 집회를 했다. 그것에 상당히 감명을 받아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들 모임에서 “요새 경실련이란 시민단체가 있는데, 건전하고 스마트한 단체 같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당시 내가 알던 교수 한 분이 서경석 경실련 사무총장을 소개해 주었다. 경실련 사무총장은 경실련을 만든 취지부터 시작해서 미국에서 공부한 얘기, 그 전에 감옥에 들어간 이야기 등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회비 수익으로 상근자 월급을 주기 힘들 정도로 경실련 재정이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았다. 마침 수중에 가지고 있던 수표 1장이 있기에 바로 기부했다. 그 당시에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더구나 경실련은 기업인들한테서 돈이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기부하는 사람도 없었다. 바른 경제 동인회 - ‘노동조합은 우리의 파트너다’ 위정희| 바른 경제 동인회는 어떻게 창립하게 되었나? 박종규| 그 당시, 87년도에 노동분쟁이 크게 벌어졌었다. 88년도, 올림픽 때문에 조금 주춤하다가 올림픽이 끝난 후 또 노동분쟁이 심해졌다. 어떠한 질서도 없이 한 번에 폭발할 때였다. 노,사가 치닫는 이러한 방식이 아닌 기업가가 고민할 수 있는 대안이 없나 고민했었다. 그러다가 과거의 일본도 해방 후 좌파의 노동분쟁이 굉장히 심했었다. ...

발행일 2009.10.08.

칼럼
경실련은 그 순수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경실련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경실련 역대 임원들의 인터뷰를 기획하였다. 그 네번째로 송월주 전 경실련 공동대표를  7월 6일 아차산에 위치한 용화사에서 양혁승 정책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 위정희 기획실장과 함께 만났다.> 송월주 : 경실련과의 인연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김성훈 경실련 통일협회 전 이사장이 나를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추천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남북한 문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최대 이슈였다. 그리고 인도적 대북지원에 대한 물고가 서서히 열리던 시기였고, 나는 인도적인 측면에서 화합하는 입장에서라면 하겠다고 하였다. 내가 알기론 당시 경실련 내에 통일협회와 관련하여 임원 및 조직을 개편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통일협회의 성향이 많이 바뀌었다.  아마 내가 통일협회의 성격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 듯 싶다. 임기가 만료되었을 때 다시 이사장으로 계속 있어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부터 북한을 10번정도 방문하였을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경실련 내 경불련 공동대표, 경실련 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경실련이 NGO, 시민 활동에 선도적이고, 향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 위정희: 경실련이 올해로 창립 20주년이 되었는데, 초창기 경실련에 참여하셨을 때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대표님이 계실 때가 조금 속되게 말하면 가장 잘 나가던 때였는데요(웃음). 송월주: 그렇다. 90년대 초반이었으니, 내가 대표로 있던 그 시절이 속되게 말하면 경실련이 가장 잘 나가던 때였다. 재정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관심이슈의 발굴 및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어서, 사무실은 늘 기자들, 시민들로 북적였다. 특히 함께하던 사람들도 순수했다. 그 때 경실련은 순수성을 지켰다. 송월주 : 다시말하지만, 그 때는 모든 것이 경실련을 거쳐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또한 경실련은 그 당시 존재했던 사회적인 문...

발행일 2009.10.01.

스토리
[20주년] 10년 회원, 경실련을 만나다 [호프-호프 데이 현장스케치]

경실련 10년 후원회원과 함께 한 호프-호프 데이 정리: 강영실(갈등해소센터 간사) 올해로 경실련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11월 4일 예정인 20주년 기념행사에 앞서 9월 10일 목요일 저녁 경실련회관 2층 강당에서10년 넘게 경실련을 후원하고 계신 회원님을 모시고 서로 고마움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호프-호프 데이(Hope-Hof Day)”라는 이름으로 회원님들께 초청 메일을 보내면서 경실련회관까지 오시게 하는 것이 실례이지 않을까, 어떻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드릴까 걱정이 앞섰지만 먼 길 마다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행사 시작에 앞서 상근자 공연 리허설을 합니다. 후원의 밤 행사에서 한 번 무대에 선 경험이 있지만 여전히 쑥스럽기만 합니다. 산뜻한 느낌의 파란색 새 현수막을 달고, ‘땡땡이’ 무늬가 있는 초록색 책상보를 씌워놓으니 강당이 새롭게 보입니다.   저녁 6시 30분, 회원담당인 노정화 부장이 회원들이 도착하고 계시다는 연락을 해 옵니다. 얼른 내려가서 도착하신 회원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준비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두 번째 접시를 비웠을 무렵 위정희 기획실장이 행사시작을 알립니다. 행사는 이근식 공동대표 환영사, 이대영 사무총장 감사인사, 경실련 20년 발자취 영상보고, 감사패 증정, 상근자 축하 공연, 담소의 시간, 기념촬영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근식 공동대표 환영사 “ 10년 이상 경실련의 식구로 동고동락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경실련은 계속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요즘 언론에서 잘 전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는 KBS 9시 뉴스에 경실련이 발표한 ‘서울시 구의회 해외연수 실태분석’결과가 방송되는 것을 보고 반갑고 기뻤습니다. 경실련 20년 역사 중 지금이 가장 어려운 시기인 듯합니다. 상근자들과 회원들이 어려운 상황을 꿋꿋이 잘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지는 과정이 아닌가, 어려움 겪으면서 다 같이 ...

발행일 2009.09.14.

칼럼
무엇을 위한 시.군 통합인가

이기우 경실련 지방자치위원장(인하대 교수)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행정구역 개편을 제안하면서 이와 관련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중앙정치권과 중앙정부는 시·군이 통합되기만 하면 지역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처럼 성급하게 서둘고 있다. 주민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지역 경쟁력이 높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중앙정부에서는 통합하는 시·군에 대해서 매년 50억의 특별교부세를 추가하고 국고보조금을 상향조정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정부의 약속은 변칙적인 교부세 운용이 된다. 이는 결국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불이익으로 돌아간다. 정치권의 주장처럼 통합으로 지역 경쟁력과 주민 편익이 높아진다면 정부가 나서서 지원하지 않아도 자진해서 통합을 할 것이므로 구태여 국고를 낭비하면서까지 무리한 지원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군의 통합이 중앙정치권이나 중앙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별반 효과가 없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대대적으로 통합하고 난 뒤에 지방자치단체의 행정효율은 오히려 떨어지고 1인당 행정비용은 증가했다는 보고가 많다. 우리도 1994년 이래 80여개 시·군을 40여개로 통합했지만 좋은 결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지방 재정자립도는 떨어지고 행정비용이 증가되고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시청이나 군청이 주민들로부터 멀어져 주민 불편만 가중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통합으로 수천억원의 행정비용이 절감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전혀 검증되지 않은 숫자놀음이다. 청사나 공무원 감축 등을 예상하여 절감비용을 계산하고 있으나 이미 통합된 40여개 도농 통합시에서 청사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곳이 많으며 공무원 수도 별반 줄어들지 않고 있다. 또한 통합비용과 통합 후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비용 등이 절감되는 비용을 훨씬 능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 정부의 주장은 믿을 수가 없다. 특히 큰 지역과 통합한 작은 시·군은 출장소로 전락하고 지역 리더십과 지역 발전 ...

발행일 2009.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