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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명분과 신의를 주었던 경실련

             인생의 명분과 신의를 주었던 경실련 이 은 기(전 시민입법위원회부위원장 )   경실련과의 첫 인연 맺기는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제대로 된 의견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단체가 없던 80년대 말 그런 단체가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노태우 정권 막바지 날만 새면 전청부지로 오르던 전세보증금 파동으로 많은 세입자들이 목숨을 끊던 그 시대적 상황에서 경실련의 태동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즈음 부천지역에서 단칸방 세를 살던 세입자 엄마가 방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말을 듣고 뒷산에 가 천막칠 자리라도 물색해 보려고 외출하면서 세 쌍둥이가 놀고 있는 방문을 잠그고 간 사이 아이들이 장난을 하다가 불이나 모두 타 죽은 사건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되었다. 세 쌍둥이 아이들의 귀여운 사진도 실려 있었다. 문래동에서 개업하고 있던 때라 거리상 멀지않은 한겨레 양평동 사옥으로 찾아가 그 가족에게 조그만 성의를 전달해 달라고 무명으로 맡긴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경실련의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바쁜 직업을 핑계로 후원금만 내는 회원으로 우선 가입한 것이다. 중앙위원으로 있던 어느 날 김일수 교수님께서 상집위원으로 같이 일해보자고 전화를 주셨다. 만장일치제로 운영되어 밤늦게 끝나기 일쑤였던 상집회의에 나가면서 경실련의 업무와 좀 더 가까워졌다. 하마터면 둘로 쪼개질 뻔했던 경실련이 끝까지 같이 가야 한다는 의견으로 창립 후 최대위기였던 양분을 막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 때 과감한  시민운동을 지향했던 인사들은 다른 시민단체로 옮겨간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나는 점진적 개혁을 지향하는 영국의 페비아니즘(Fabianism)이 우리 사회에서 적절하다는 생각에서 경실련의 방향성은 시종여일해야 된다고 보았다. 당시 ‘헌변’에서 낸 경실련 등 14개 시민단체를 상대로 국민세금환수라는 명분으로 낸 소송에서 ‘경실련’과 ‘도시개혁센터’를 변론하였다. 당시 공동대표였던 고 유현석 변호사님과 상의해서 답변서를 작...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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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통일협회 설립, 활동과 그 의미

  경실련 통일협회 설립, 활동과 그 의미 심 의 섭 (통일협회이사) 경실련 <통일협회>는 시민이 주체가 되어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통일운동을 전개해 민족통일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을 기본방침으로 해 1994년 1월 18일 발족했다. <통일협회>는 설립 취지문에서 창설 이래 4년간의 경제정의 실천의 성과물이 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을 천명하였는바 이는 남한사회만의 개혁, 분단 상태하의 경제정의는 통일을 우리 당대의 과업으로 설정하는 한 영원한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창립모임 당시 종로 3가와 종묘 앞은 쉼터로 개발하기 위해 땅을 이리저리 뒤집어 놓은 상황이었는데, 그 근방에서 기념 회식이 있었다. C 교수, O 교수들과 함께 참석하였고, 보수논객 J씨도 옆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나는 정책위원(1994-1996)으로 활동하였으며 <남북경협의 현장>이란 저서를 감수하기도 하였다. 내가 통일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동기는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과의 인연이다. 마침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래 최장수(最長壽) 장관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사임하면서, 유관단체와 여기 저기 편한 자리를 모두 마다하고 친정(?)인 경실련으로 돌아오면서 퇴직금의 대부분을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단체에 기여하겠다고 한데서 요새 말로 ‘감동을 먹었기’ 때문이다. 한완상 이사장-이장희 운영위원장 팀의 후임으로 김 장관께서 통일협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나에게 운영위원장을 맡아 함께 일하자는 제의였다. 나의 고사(固辭)도 아랑곳없이 함께 통일협회를 이끌면서 통일협회 제4대 운영위원장, 경실련 상임집행위원(2001.3-2003.2)으로 일하게 되었다. 주요 활동으로는 2001 금강산 “민족통일 대토론회”에 참관인으로 참석(200l 6.14-6.16), 2001 민족통일대축전 평양공동행사 참석 (경실련, 공동의장, 2001.8.15-8.21), 경실련 통일협회 민족화해 아카데미 제12기 통일체험현장학...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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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경실련 -경제정의기업賞을 중심으로-

  나와 경실련 -경제정의기업賞을 중심으로-                                                  김 홍 권(전 경제정의 연구소 이사)   1. 진로의 전환   오래전부터의 교통사고후유증과 적성에 맞지 않는 마케팅 분야에서 나는 1987년 글이 있는 포토에세이분야를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 자진은퇴를 결행했었다. 그 후 1-2년 동안 동아미술제나 UNESCO사진전과 같은 공모전에서 “자본 자유화”, “생의 의지”, “Reading the Bible”과 같은 주제로 입상, 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도 되며 모처럼 자유롭고 또 열심히 새 길로 전진하고 있었다. 이는 내가 젊어서부터 사진과 글쓰기(시사평론 기고문집 “내가 본 세상” 2001년 참조)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9년 나는 “官民 합동의 대기업 종합평가 제도를 제안함”이라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기고하고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그 것의 실현을 위해 1년 동안을 사전조사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한 이유는 1989년 당시 땅 투기, 탈세, 정경유착, 은행자금독식, 불공정 및 하도급거래, 산업재해, 건어물 사재기 적발에 이르기까지 천민자본주의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기업들의 모습이 연일 매스컴에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의 시작을 앞둔 기업권력시대로 진입하는 단계에서 이와 같은 비윤리적인 기업윤리행태가 지속된다면 기업은 물론 나라에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어렵게 계획했던 포토에세이의 새 길을 접고 55세가 넘은 나이에 작은 소명의식으로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전개과정   나는 신문에 기고한 기업평가시스템을 어느 단체와 어떻게  창출할 수 있을 지 고민하다가 1990년 한국의 경영자賞제도를 오랜 동안 운영해오던 한국능률협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그 곳 연구원(이신형 현, 리서치코리아 대표)에게 전화로 설명했고 그의 즉각적인 반응과 적극적인 협력으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실련 ...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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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활동의 회고와 제언

  경실련 활동의 회고와 제언 김완배(경실련 중앙위원회 부의장) 20년 전 경실련 활동으로 본인을 이끈 것은 ‘경제정의 확립을 위한 실천적 대안 마련’이었다. 그 시절은 부동산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이슈였을 뿐만 아니라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 협상으로 우리 농업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하였던 시기였다. 두 문제 모두 관심분야였고, 특히 농업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대안 마련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정책위원회 내에 농업분과 위원으로 참여를 시작하였다. 비좁은 임대사무실에 십시일반 모은 회비로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이념적인 거대 담론의 논의가 아닌 실천적인 대안 마련에 머리를 모으는 자리였기에 항상 뿌듯한 마음으로 열정을 쏟을 수 있었다. 회의 후 각자 주머니를 털어 마시는 맥주 한 잔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때론 기존의 이념적인 운동조직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시각에 대해 경실련의 차별성을 설득하는데 애태웠던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경실련의 우리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와 실사구시의 정신이 확산되면서 주위의 시선이 따스함과 격려로 변화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뛰어난 인재들이 활동에 속속 동참하면서 회원으로서의 자긍심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호사다마일까, 경실련의 영향력이 커짐과 반비례하여 순수성이 훼손되어가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경실련을 정관계 진출의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일부 회원의 모습이 눈에 띌수록 경실련 활동에 대한 열정은 식어만 갔고,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정책위원회 활동을 접고 평회원의 신분만 유지하기를 5-6년 정도 하였던 것 같다. 순수한 시민운동 정신을 이용당했다는 철없는 생각에 처음에는 다소 허탈하기도 가끔은 화가 나기도 했지만, 난(蘭)과 함께한 세월이 흐르면서 부질없는 생각임을 깨닫게 되었다. 대신 농업․농촌을 돕는 일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현장을 찾아 작지만 도움 줄 수 있는 일을 찾으면서 거의 경실련을 잊고 지내게 되었다. 덕분에 전국 곳곳에 ...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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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100년 도약을 기대하며

  새로운 100년 도약을 기대하며 김석준(전 상임집행위원회 부위원장)     나는 1989년 경실련 창립 이후 평생회원, 조직위원장, 윤리위원장, 상임집행위 부위원장, 정책위 부위원장 등을 지내고 경실련이 초기 어려웠던 고비마다 비상대책위원을 세 차례 지냈다. ‘정보공개연구팀장’을 맡아 정보공개법 제정을 경실련이 주도하는데 동참하고 연구결과를 경실련 총서 2권인 ‘열린사회 열린정보’로 발간하였다. 초기 경실련에는 정치학자나 행정학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내가 각종 토론회나 발표회에 경실련의 대표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10여년 뒤 경실련과 정부의 관계가 돈독해진 뒤에는 정치행정학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이들이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시민단체대표로 참여하면서 외로움은 덜했다.     내가 경실련 창립부터 관여하게 된 것은 서경석, 이형모, 신대균 목사 등 새문안교회팀과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이다. 특히 서울공대 1년 선배인 서경석 목사와 공대시절 ‘산업사회연구회’를 만들어 함께 공부한 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소개로 1969년 11월에서 1970년 2월까지 구로공단과 인천판유리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기독교 사회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공대로 돌아와서 나는 서울공대 기독학생회 총무와 회장을 지내면서 방학 중에는 새문안교회 대학부를 다녔다. 행정대학원 진학 후에는 새문안교회 청년회 총무를 지낸 인연으로 내가 대학교수였지만 경실련 창립의 주력세력인 새문안교회팀이나 서울대기독학생회팀과는 쉽게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이들과의 인연이 정치행정학자로서는 예외적인 처신이었지만 내가 편안하게 경실련에 동참하게 한 것이다.     내가 경실련 활동에서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창립 초기 경실련의 활동 방향을 모색하는 데 기여한 점이다. 특히 창립 3주년과 5주년 및 11주년 기념 전국행사에서 경실련 활동에 대한 평가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내가 발제를 하고 토론을 거쳐 경실련의 활동방향이 회원 총회에서 채택되는 등의 일에 동참한 것이다.    ...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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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권의 책보다 더 가치있는 경험, 경실련

  만 권의 책보다 더 가치있는 경험, 경실련 김상겸(전 경실련 정책위원장) 시민단체로서 경제정의실천연합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화과정에서 등장한 경실련은 그 명칭 그대로 경제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시민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분석하여 그 대안을 제시하는 시민단체의 맏형으로 20년의 세월 동안 많은 활동을 해 왔다. 경실련 이전에 시민단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경실련이 결성되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분야별로 많은 시민단체가 만들어졌고, 시민운동이 체계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의 경실련활동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지만, 시민운동의 그 순수한 열정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경실련의 창립멤버는 아니지만 오랜 기간 시민입법위원장을 하였고, 지난 대선 때는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활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경실련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실련이 창립될 당시 필자는 한국에 없었기 때문에 인연을 맺으려고 했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누가 언급한 것처럼 인연이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하였는데, 필자 역시 우연한 기회에 경실련이 주최하는 토론회에 참여하였고, 이를 통하여 경실련에 가입하였다. 당시 경실련에는 사무총장으로 현 법제처장을 맡고 있는 이석연 변호사가 있었고, 시민입법위원장에는 숭실대 강경근 교수가 활동하였다. 독일에서 유학하던 중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지켜보았던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시민단체에 가입한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단지 회원이었던 필자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그냥 우연이었다. 당시 학회활동을 같이 하였던 강교수가 건강문제로 임기가 남은 시민입법위원장직을 수행하기 어려워지자, 그 잔여임기 동안 시민입법위원장직을 대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연 아닌 우연으로 ㎰坪攘...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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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경실련

  시민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경실련                           김동흔(전 경실련 협동사무총장)                     1989년 경실련 창립에 불교계의 재가(在家)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경실련 창립 당시 만연한  부동산투기로 인한 주택 값과 전세 값의 폭등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었다. 부동산투기로 횡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폭등하는 전세 값을 감당하지 못해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자살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회부조리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민들이 땀 흘려 일해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지고, 아파트 분양 추첨에 당선되면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버는 불로소득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부정의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문제 제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적 상황에서 경실련이 창립하였다.  경실련은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이루는 민주복지 건설”을 창립목적으로 내세웠다. 당시 반독재․반체제를 내세우며 민중계급을 바탕으로 체제변혁을 추구하는 정치적 사회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합리적인 정책적 대안을 통한 비폭력적인 운동방식으로 사회개혁을 이루겠다는 경실련의 운동방식은 새로운 도전이었고 좌우 양편으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경실련 창립은 그 동안 방치돼왔던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언론과 시민들로부터는 많은 호응을 받았다. 경실련의 창립으로 우리나라의 사회운동이 민중계급에 기초한 계급적 혁명운동에서, 정책 전문가와 일반시민이 결합하여 사회정의와 경제정의를 실현하려는 시민운동으로 변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은 경실련에 참여하는 불교인 200여 명이 주축이 되어 1991년 7월 13일 창립했다. 경불련(經佛聯) 창립 당시, 불교계는 우리사회의 민주화 진행속도를 따라가지 ...

발행일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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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혁과 시민참여의 메카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도시개혁과 시민참여의 메카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권용우(전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운영위원장)  1996년 6월 이스탄불에서는 세계 180여 개국 2만 여명의 도시전문가들이 참석한 도시정상회의가 열렸다. 이스탄불 회의는 도시개혁운동의 논거를 제공하는 동시에, 민간기구가 정부기구와 동반자 관계를 이루며 도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는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와 1995년의 삼풍백화점 대참사로 국민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이런 가운데 1995년부터 실시된 지방자치제는 우리사회에 순기능을 준 면이 있다.   이러한 국내외적 시대흐름을 도시문제로 묶어 시민운동으로 승화시킨 곳이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삼풍 참사 1주년을 맞는 1996년 6월 28일에 도시개혁 시민운동을 선언하고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를 만들기 위해 준비했다. 성수대교붕괴 2주년을 맞는 1996년 10월 21일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발기대회를 개최하였고 1997년 6월 28일에 도시개혁센터를 창립했다.  서울대 권태준 명예교수, 경원대 최병선 교수(전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장), 중앙대 하성규 교수(전 한국주택학회장), 한양대 김수삼 교수(전 대한토목학회장), 성신여대 권용우 교수(대한지리학회장), 유재현 박사(전 경실련 사무총장), 중앙대 김명호 교수(전 대한건축학회장), 홍 철 박사(전 인천대 총장), 중앙대 이경희 교수(전 대한가정학회장), 충북대 황희연 교수(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장) 등이 앞장서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를 만들었다.  경실련 도시개혁센터는 지속가능한 도시, 친환경적인 도시, 시민 중심의 도시, 균형특화된 도시, 살기 좋은 도시 등을 도시개혁운동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1997년 창립한 이후 2004년까지 경실련 도시개혁센터가 이루어 낸 주요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광역도시권 설정과 광역도시계획이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그린벨트 해제를 공...

발행일 2009.11.17.